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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에 거래되는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책이 절판돼서 살 수가 없어서 비싼 값에 중고거래하시고,
국회도서관에 몇 만 원씩 줘서 제본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원래 이 책 자체가 정부부처 사이트에 올라왔던 내용을 엮은 것뿐입니다.
좋은 자료이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치솟는 분양가, 어찌 하오리까"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⑬]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특별기획팀 2007.03.13

분양가 규제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한 1977년 10월 11일자 중앙일보 사설

 

"금년 들어 가장 폭등한 것이 아파트값이라 할 수 있다. 3월에 평당 40만원 선이던 아파트 분양가가 9월 들어 60만원을 돌파했다. 다른 공산품의 경우는 10% 이하로 가격을 인상하려 해도 정부의 심한 규제를 받는데 아파트의 경우는 분양가가 50% 가까이 올라도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아파트값 안정은 경제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큰 비중을 갖는 만큼 정부는 여기에 좀더 신경을 쓰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977년 10월 11일 중앙일보 사설)


30년 전 일간지에 실렸던 신문 사설이지만 2007년에도 의미 있는 내용이다. 정부가 아파트 분양가의 일방적인 상승을 규제하는 민간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는 1977년 처음 실시됐다. 이 제도는 국회에 계류 중인 주택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2007년 9월 다시 도입된다.

빈약한 재정으로 주택공급을 민간에 의존해야만 했던 정부는 주택건설을 촉진해야 할 때마다 분양가를 자율화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아파트가 전 국민의 주거형태로 각광받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 이후 분양가 자율화는 예외 없이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가격이 비싸지면 수요가 줄어들어야 하지만,
미리 분양하는 아파트에는 이 같은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만성적으로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소비자는 고분양가 주택이라도 구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
이다.


시중에 여유자금이 남아돌고 투기심리가 팽배한 상황이라면 이는 더욱 가속화된다. 1970년대 말이 그랬고, 2000년대 초도 그랬다. 이런 이유로 30년 동안 민간아파트 분양가가 자율화돼 있던 기간은 10년 정도에 불과했다.(1981년 6월~1982년 12월, 1999년 1월~2007년 9월)


분양가를 획일적으로 규제해도 부작용이 발생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획일적인 분양가 규제로 공급이 위축된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정부는 물가안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1983년에 정한 분양가를 1989년까지 유지했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이 25.6%에 달했는데도 주택가격을 강하게 억누른 결과로 1980년대 말 부동산 대란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분양가 자율화는 예외없이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한 주상복합 모델하우스에 몰린 청약인파

 

건설사의 폭리를 막아라 - 규제의 시작


분양가 우여곡절의 역사는 1977년 시작됐다. 1977년은 중동특수로 수출이 100억 달러를 달성하고 경상수지가 1965년 이래 12년 만에 흑자를 기록한 해였다. 시중에 넘치는 부동자금은 부동산에 몰렸다. 평당 10만원을 호가하는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꾼이 몰려 124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고, 어떤 투기꾼은 엄청난 거액인 2억원을 내어 서민용 아파트 100가구분을 분양 신청해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도 했다.

민간아파트 분양가는 아파트 투기붐을 편승해 급등함으로써 실수요자의 공분을 자아냈다. 아파트 분양가가 급등세를 보이기 전인 1977년 4월 이미 민간아파트의 분양가는 공공 부문의 아파트보다 비쌌다. 민간아파트 분양가는 지방자치단체가 짓는 아파트보다 80~100%, 주택공사 아파트보다 40%, 한국감정원의 평가보다 100~150%나 높았다. 같은 해 9월 민간아파트 분양가는 5개월 전보다 무려 30~60% 상승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연히 아파트 분양가를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분양가 규제 도입을 알리는 1977년 10월 30일자 조선일보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과는 분양가를 안정시킬 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주택정책 계장이었던 김종만 씨의 증언이다.

"주택정책과 직원 5명은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과 함께 다양한 정책을 고려했습니다. 업체마다 다른 분양가를 내놓지 못하도록 외장재 없이 기본 구조만 만들어 분양하는 ‘코어제’도 고려했습니다만 반응이 좋지 않아 접었습니다.

당시 공공자금으로 짓는 아파트의 분양가는 1963년부터 최고가격으로 묶어 규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민간아파트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상한제의 기준은 월급쟁이가 5~7년 정도 벌어 마련할 수 있는 금액으로 했죠. 또한 아파트의 분양가를 통제하면 비싼 토지에 대한 민간 건설업자의 수요를 억제, 토지가격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건설업체는 정부의 방침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초 불황, 주택사업부서 해체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는 불황기였다. 원유 파동과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한 경기침체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시절이었다. 여기에 1978년 8·8 부동산종합대책이 겹쳐 주택경기는 침체일로를 겪었고 미분양 아파트도 속출했다. 1981년에는 2~3년 전에 건설된 아파트 등 2000여 가구가 미분양 상태로 남아있을 정도였다. 1980년 미분양에 고민하던 한 건설업체는 아파트를 할부로 판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건설업체들은 앞 다투어 주택사업 전담부서를 해체했다. 1981년엔 건설업체 54개 업체 중 19곳이 주택사업 전담부서를 없앴다. 부동산소개업소도 큰 타격을 받았다. 1980년 5월~8월까지 4개월 동안 서울시 부동산소개업소의 매매실적은 평균 2~3건 밖에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문을 닫은 업소가 속출했고 일부는 ‘부업’을 찾아나섰다. 금전대출을 알선하거나 가게 안에서 담배, 필름, 우표를 팔았다. 주택시장 경기 침체는 건축자재 시장 등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한신공영 쇼크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부는 1981년 6월 주택경기 활성화 대책에 이어 민간아파트의 분양가를 자율화했다. 곧 아파트 분양가가 급상승했다. 이 때 이른바 ‘한신공영 충격’이 나타났다. 분양가 자율화 조치 이후 처음으로 아파트 분양을 실시한 한신공영은 분양가를 대폭 인상, 사회적인 논란을 야기했다.

당시 한신공영은 68평형 등의 아파트 분양가를 평당 138만원(전용면적 기준 179만원)으로 정했다. 이는 분양가 상한선에서 22%를 올린 수준이었다. 한신공영에 자극받은 다른 건설업체들도 분양가를 인상하면서 ‘분양가 인상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기존 아파트는 기존 아파트대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행정권고’라는 가격통제

1981년 6월 시행된 분양가 자율화는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져 사회적 논란이 뜨거웠다. 1981년 8월 13일자 조선일보

당시 언론은 분양가를 올리는 건설업체에 자제를 촉구했다. 분양가 자율화를 찬성했던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율화가 된 이상 어느 특정 아파트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비싼들 시비를 걸 소지는 없어졌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아파트 투기붐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는 이 1억원짜리 아파트에서 ‘솥뚜껑’을 보는 놀라움을 갖는다. 1억원짜리가 동반할지도 모르는 집값의 앙등과 이로 인한 파급효과 때문이다."(조선일보 1981년 8월 13일)

사회적 비난이 비등하자 건설업체들은 모임을 갖고 자율적인 규제를 약속했다. 주택경기 활성화라는 목표를 갖고 있던 정부는 분양가 자율화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건설사의 폭리와 물가에 대한 영향을 고려, 전용면적 25.7평 이상의 아파트에 대해서도 ‘행정권고’ 형식으로 실질적인 가격통제를 계속했다.

1982년은 주택경기가 냉온탕을 오간 해였다. 정부는 상반기까지 지속적으로 각종 주택수요 진작 조치를 취했다. 양도세 등 각종 세금을 낮추고 주택부금 금리를 인하했다. 5월에 이르자 주택경기가 점차 되살아났다.



퇴직금 2배 이상인 프리미엄

실질적인 분양가 통제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시중에 돈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꾼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예가 1982년 11월 초 문제가 된 ‘개포 프리미엄’ 사건. 복부인과 부동산업자의 결탁으로 이 지역의 아파트 값 8800만원에 프리미엄 4500만원이 붙었던 이 사건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불과 4년 전 아파트 프리미엄이 400만원 정도였고 한 달 전 프리미엄이 1600만~1700만원가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급등세였다. 당시 일류회사 고참 부장이 15년 근무하고 받는 퇴직금이 2000만원 수준이었으니 서민의 허탈감은 대단했다.

1982년 11월 8일 오전 경제기획원 녹실에선 김준성 당시 경제부총리 주재로 부동산 투기에 대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전날인 일요일 저녁 관계 장관들에게 연락, 서둘러 소집된 회의였다. 회의는 1시간 반을 넘기며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일부 참석자들은 ‘부동산 경기가 또 꺼지면 3년은 간다’며 투기 억제보다 경기부양을 주장했다. ‘건설경기의 회복을 위해 어느 정도의 투기현상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당시로서는 경기부양이 우선과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회의 이후 강력한 분양가 진정대책이 나왔다.

투기를 없애기 위해선 투기꾼이 노리는 분양가와 실거래가 사이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분양가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었다. 물가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할 경우, 가격 급등으로 인한 물가 불안정이 우려됐다.

아파트 분양에 채권입찰제 도입


김종호 당시 건설부 장관은 1983년 1월 정부가 올해 물가안정을 최우선경제시책으로 삼고 각 업체가 물건값을 내리고 있는 마당에 아파트가격만 올릴 수 없다고 지적, 민간아파트에 대해서도 경영개선을 통해 인상요인을 최대한 흡수해 분양가를 억제하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전용면적 25.7평 초과 민간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1982년 수준인 134만원으로 정해졌다.

분양가 통제를 이어가는 대신 보완책이 필요했다. 정부는 정인용 경제기획원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부동산대책실무위원회를 구성, 대책수립에 나섰다. 여기서 결정된 것이 ‘분양가 실세화’ 방침. 이 기본 방향 속에서 여러 가지 대안을 놓고 고심하던 정부는 1983년 청약제도 강화와 함께 채권입찰제를 도입한다.

채권입찰제란 국민주택채권을 많이 사는 사람에게 원하는 아파트를 분양하는 제도다. 채권을 매입한 아파트 당첨자는 당장 싼 값에 채권을 팔아도 되고 20년이 지난 뒤 연이자 2%와 함께 되찾을 수 있었다. 전용면적 25.7평 초과 민간아파트에 대해 도입된 이 제도는 건설사의 폭리를 막는 한편 단기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도 막는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1883년 4월 김종진 건설부 장관은 국회 건설위원회에 출석, 다음과 같이 말했다. "투기과열현상은 채권입찰제의 시행으로 완전 제거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실시할 경우 장기적으로 투기요인을 제거함으로써 주택가격의 안정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평당 분양가 134만원의 교훈


원가가 상승하면 분양가도 올려야 했지만 물가안정을 절대명제로 삼고 있었던 정부는 분양가를 올리지 않았다. 1983년 분양가 134만원은 1980년대 후반에도 그대로였다. 부작용이 나타났다. 민간 건설업체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요가 많은 수도권에 아파트 건설을 기피했다. 당시 필요한 주택건설물량은 최소한 연간 35만호였지만 1984~1987년까지 매년 지어진 집은 22만호에 불과했다.

장기간에 걸친 획일적인 분양가 통제는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주택공급 위축으로 이어졌다. 1989년 1월 14일자 중앙일보

건설업체들은 분양가 상한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오피스텔, 조합주택 등에 주력하거나 땅값이 싼 지방으로 진출했다. 그 결과 1988년 5월 이후 7개월이 넘도록 서울 지역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민간아파트 분양이 없었다. 땅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당시 71개 건설업체는 수도권에 46만4000평에 이르는 택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시중에는 돈이 넘쳤다. 1988년은 건국 이래 최초로 3년 연속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했고 연 10% 이상 가파른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등은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를 넘으면 주택수요가 늘어난다고 했는데 1988년은 막 3000달러를 넘긴 해였다.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이었던 홍철 씨의 말이다. "무역수지 흑자 등으로 시중에 유동성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렸습니다. 88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나자 부동산이 들먹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분양가 현실화’라는 폭탄선언

1988년 12월 건설부장관에 취임한 박승 건설부 장관의 ‘폭탄선언’은 타오르는 부동산 경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2월 12일 국장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박 장관은

 

"민간의 공급을 촉진하기 위해 분양가 자율화로 건설업자에게 집을 지을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시 아파트의 평당 비용은 평당 분양가를 넘어선 상태였습니다.

정이윤을 보장해야 공급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분양가를 현실화하자고 했습니다."

박 장관의 회고다. 이 발언은 부처 간 협의를 거치지 않은 박 장관만의 생각이었다.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과장이었던 이동성 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주택문제로 외부 회의에서 돌아오니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장관이 분양가 현실화 발언을 했는데 내용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던 터라 놀랐습니다."



‘하늘은 두 쪽 나지 않았다’

당시 박 장관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추진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 장관은 간부회의 뒤 조순 경제기획원 장관을 찾아가 분양가 자율화에 대한 동의를 얻었지만 청와대의 반대에 부딪쳤다. 반대의 중심에는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이 있었다.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주택금융제도나 토지 공급 등을 완비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시기상조라는 이유였다.

박 장관은 1989년 4월 노태우 대통령을 찾아가 직접 분양가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 장관은 비서실장을 통해 사직서를 제출했고 사표는 7월 받아들여졌다. 박 장관의 퇴진을 두고 세간에는 문책성 인사로 알려졌다.


"공산주의 세상이 더 낫다" ?

정부는 박 장관의 발언 직후 분양가 자율화 방안을 공식 부인했으나 발언의 파장은 컸다. 신규아파트 가격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존 아파트 값까지 급등했다. 1989년 4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일부 평형은 평당 1000만원대를 넘어섰다. 자고 일어나면 ‘1000만원이 올랐다’는 말이 나돌았다.

문희갑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주택문제가 체제를 위협할 정도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수요는 공급을 상회했습니다. 소득이 늘자 주택수요는 더욱 늘었고 투기까지 겹쳐 값이 올랐습니다. 당시로서는 체제 붕괴 위협으로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하기로 하고 신도시를 물색한 것이지요."('실록 6공 경제'-중앙일보사)

당시 한 신문에 등장한 택시기사의 말은 여론을 잘 보여준다.

"가만히 앉아서 부동산 투기로 하루에 수백만원씩, 아니 수억원씩 벌어서 챙겨먹는 주부들과 부동산 투기자들이 망해서 죽어가는 꼴을 보고 난 뒤에야 내가 발 뻗고 죽을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공산주의 세상이 더 나은 게 아니겠습니까."(국민일보 1989년 5월 11일자)



건설업계의 위협, 평당 197만원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를 요구하는 민간 건설업체의 목소리를 전하는 1989년 10월 12일자 조선일보

주택공급을 늘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정부는 분당과 일산 등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민간 건설업체는 정부의 이런 점을 이용, 지속적으로 분양가 인상을 요구했다. 분당신도시 시범단지 분양을 코앞에 둔 1989년 10월 12일 민간 건설업체는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민간 건설업체의 적극적인 분당개발계획 참여가 사실상 이뤄지기 힘들 것’이라며 정부를 은근히 위협할 정도였다.

정부도 업계의 요구를 마냥 묵살할 상황이 아니었다. 정부는 분양가를 어느 정도 현실화시키면서 지나친 가격 상승은 막는 원가연동제를 도입했다. 처음으로 원가연동제를 적용받아 공급된 서울 쌍문동 한양아파트는 평당 197만원으로 분양됐다.



원가 계산 불가능한 ‘원가연동제’


원가연동제란 아파트 분양가를 택지비와 건축비 등 원가에 연동시켜 정부가 통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분양가 상한을 정부가 직접 규제하는 것보다는 완화된 제도이기는 하지만 가격을 통제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규제 중심 정책이었다. 1990년대는 표준건축비 인상을 둘러싸고 거의 매년 정부와 업계 간 갈등이 반복했다. 표준건축비의 비현실성 등이 이유였다.

당시 주택국장이었던 이동성 씨의 말이다. "김대영 건설부 차관이 취임했을 때, 표준건축비를 인상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치자 김 차관이 가격 현실화를 검토해보라고 했습니다. 건설업체쪽 사람들이 찾아왔길래, ‘분양 원가를 계산해서 가지고 오라’고 하자 만세를 부르며 돌아가더군요. 하지만 약속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새벽 2시가 되어 빈손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도급 등으로 분양원가를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건설업체를 살려라 - 분양가 완전 자율화

상황은 1990년대 중반 도산하는 건설업체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바뀐다. 삼익과 우성 등 1980년대를 풍미했던 건설업체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하도급 업체를 포함, 2만여개 업체에 200여 만명의 근로자가 생계를 꾸려가는 주택건설업계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정부는 단계적으로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하기 시작했다.

단계적으로 자율화로 대체되던 원가연동제는 IMF 외환위기 당시 일자리 공급을 위해 추진된 주택경기 부양 정책 중 하나로 완전 자율화된다.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과장이었던 이춘희(현 건교부 차관)씨의 말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공식실업자만 20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그중 건설 부분 실업자가 100만명에 달했습니다. 주택경기를 살려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1998년 주택경기를 살리기 위해 취해진 수도권 분양가 자율화는 또다시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고분양가 → 주변 집값 상승 → 이를 바탕으로 한 고분양가’의 연쇄반응이 나타났다. 수도권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가 시작된 이후 서울 지역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1998년 512만원에서 2006년 1546만원으로 급상승했다. 8년 만에 세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아파트 평당 분양가 최고액은 1999년 6월 1072만원을 거쳐 2006년 3250만원에 달했다. 2007년 1월 현재 분양가 최고액은 평당 3395만원으로 2006년 기록을 갱신했다. 분양가 규제의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다시 원점으로 - 분양가 규제

분양가 규제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언론은 연일 분양가 상승 문제를 다뤘다. 2002년 4월 서울시는 아파트 분양가를 과다 책정할 경우, 이를 국세청에 통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아파트 분양가는 자율적인 것으로 규제할 사항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아파트 분양가는 점점 올라갔다.

정부의 이러한 기조는 참여정부 초반에도 이어졌다. 2003년 10월 29일 ‘주택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10·29대책)’을 내놓은 김진표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TV에 출연, "분양가 규제는 정부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주택공급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고 과거 경험으로 봤을 때 여러 부작용이 있어 이번 종합대책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남의 치마 속"

2004년 2월 서울시 도시개발공사(현 SH공사)가 분양원가 구성내역을 밝히자 분양가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분양원가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2003년 11월 분양한 서울 상암단지 40평형의 수익률은 39.2%(3백10억원)였다.

2004년 2월 9일 오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분양원가 공개를 총선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논란은 이어졌다. 당시 건교부 내에선 "남의 치마 속은 왜 보려고 하느냐"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분양원가 공개에 회의적이었다.



분양가 공개, 국민들이 바랍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건설교통부와 논의 끝에 ‘공공택지 내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원가연동제) 및 주요항목 부분공개’라는 결과물을 내놓는다. 2005년 3월 공공택지 내 소형아파트에 분양가 상한제가 도입됐고, 이듬해 2월에는 공공택지 내 중대형 아파트로 확대됐다.

당시 주택국장이었던 권도엽 전 건교부 정책홍보관리실장의 증언이다. "당시 분양원가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주장의 중심은 높은 분양가를 낮추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원가공개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분양가가 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분양가상한제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신 분양가를 충분한 수준으로 책정하고 물가에 연동시켰습니다. 과거 분양가상한제가 도입됐을 때 분양가를 올려주지 않아 건설사가 아파트 건설을 기피했던 점을 고려했던 것입니다. 당시 분양원가 공개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변한 상태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요 항목에 대해 원가공개를 하게 됐습니다."



계속된 논란에 당정 모두 부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판교 신도시 분양과 은평 뉴타운 분양 논란이 이어지면서 고분양가 시비는 다시 불붙었다. 민간아파트에 대한 분양가공개 요구 목소리가 높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9월 28일 방송에 출연, "제가 (예전에는) ‘신중하자’며 원가공개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는데 지금은 국민들이 제 생각과 달리 모두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바라니까 그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2007년 1월 11일 오전 국회에서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김근태 의장과 강봉균 정책위의장, 한명숙 총리, 권오규 경제부총리, 이용섭 건교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당정협의를 열고 민간아파트 분양 원가를 수도권, 지방의 투기과열지구에 한해 공개하기로 했다. 2006년 12월 22일 민간아파트에 대한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상황에서 나온 합의였다.

정부측에서는 전반적인 주택가격 안정에 분양가 상한제가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분양원가 공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선분양제인 현재 상황에서 원가를 정확하게 계산하기 어렵고 분쟁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까닭에서였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지속적으로 분양원가 공개를 요구해왔다. 원가 공개를 하지 않는다면 도입하기로 한 분양가 상한제의 실효성이 퇴색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정은 모두 부담을 갖고 있었다. 2006년부터 계속된 논란으로 부동산 시장에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 끝에 전체 민간아파트 대신 수도권 및 투기 과열지구에 한해 분양원가 일부를 공개한다는 접점을 찾았다. 권 부총리는 이날 "분양원가를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와 분양원가 공개가 공급을 위축시켜 공급을 위축시켜 시장불안을 가중한다는 우려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합리적인 수준에서 민간택지 내 분양원가 공개 방안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2007년 3월 2일 국회 건교위에서 조일현 위원장이 민간택지 분양가 내역 공개와 분양가 상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주택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주택법 개정안은 국회에 제출됐으나 2007년 3월 2일 국회 건교위에서 수정됐다. 논란이 된 부분은 분양원가 공개의 범위. 원안은 ‘수도권 및 투기과열지구’에 적용하도록 규정했으나, 수정안은 ‘수도권 등 대통령이 정하는 지역’에 한해 공개하기로 했다. 또한 분양원가공개라는 이름 대신 ‘분양가내역 공시제’를 사용하기로 했다. 수정안은 2007년 3월 현재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분양가 규제 역사의 교훈 "아파트는 다른 상품이다"


분양가의 역사는 획일적 규제와 자율화가 가져온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격 안정을 위해 분양가를 획일적으로 규제하면 공급이 줄어드는 한편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꾼이 몰려들어 가격이 올라갔다. 반면 공급을 늘리기 위해 분양가를 자율화하면 분양가 급상승, 그리고 전반적인 집값 상승을 가져왔다.

1981년 분양가 자율화가 문제됐을 때 동아일보는 8월13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율화 뒤 분양가가 급등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문제된 아파트 분양가의 적정 수준 여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다. 아파트는 시장의 수급에 따라 적정 가격이 결정되는 다른 상품과는 다르다. 분양가가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한편으론 자율화가 노린 장점을 최대한 살려나가도록 유도해가기 바란다."
주택 공급에 민간의 손을 빌려야 하는 구조적 상황 속에서 정부는 ‘값싼 주택 공급 촉진’이라는 난제에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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