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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에 거래되는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책이 절판돼서 살 수가 없어서 비싼 값에 중고거래하시고,
국회도서관에 몇 만 원씩 줘서 제본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원래 이 책 자체가 정부부처 사이트에 올라왔던 내용을 엮은 것뿐입니다.
좋은 자료이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운 좋으면 주택뽑기 당첨’ 30년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의 변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⑭]

특별기획팀 2007.03.14

2005년 7월 막 부임한 강팔문 건설교통부 주택국장(현 익산지방국토관리청장)은 주택국 회의에서 30년간 이어졌던 주택청약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제안을 내놓았다. "주택청약제도에서 운에 기초한 추첨방식은 문제가 있다. 개선해야 한다.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전문기관에 용역을 맡겨보자."


강 국장의 이야기다. "우리 안에서도 문제의식이 많았습니다. 가입한 지 2년만 지나면 모두 같은 자격을 얻어 누가 더 필요하냐를 따지지 않고 추첨하는 것이 맞느냐는 논의가 많았습니다. 특히 저는 추첨 방식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건교부의 이런 고민은 한 달 뒤 발표된 ‘8.31 정책’에 한줄 포함됐다. ‘무주택 기간, 자산, 소득, 가구현황 등을 감안해 청약우선순위를 조정한다’는 간략한 내용이었다. 이어 건교부의 용역의뢰를 받은 주택산업연구원이 ‘청약가점제’를 대안으로 내놓으면서 내용은 구체화됐다. 1980년대 한 때 건설부 내에서 논의된 적이 있지만 개인 소득 파악이 어렵다는 이유로 도입이 미뤄졌던 청약가점제는 이렇게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



"운에 기초한 추첨방식 개선해야"


청약가점제란 청약자격을 점수로 환산, 청약가점이 높은 사람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하는 것을 말한다. 가점 항목에는 세대주 연령, 부양가족수, 무주택기간, 청약통장 가입기간 등이 가점 항목이다. 그러나 청약가점제 대안은 환영받지 못했다. 기존 청약통장 가입자 등의 반발을 예상한 열린우리당에서 반대했고, 언론의 비판이 이어지자 청와대에서도 부담을 느꼈다.

분위기는 2006년에 들어서면서 반전됐다. 고분양가를 억제하기 위해 분양가상한제 및 분양원가 도입이 검토되면서 ‘무주택 실수요자들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민간택지 아파트까지 분양가상한제를 도입하면 분양가가 낮아지고, 실거래가와 분양가의 차익을 노리는 투기꾼이 몰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기존 추첨제대로 ‘청약전쟁’이 벌어진다면 당첨기회가 낮아져 실수요자에게 값싼 아파트는 ‘그림의 떡’이 될 수 있다. 실수요자에게 값싼 아파트를 공급하자는 분양가상한제의 취지가 무색해지는 셈이다.

이에 2007년 1월 11일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30년간 이어졌던 기존 청약제 대신 청약가점제를 2007년 9월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추첨식’ 주택청약제도가 도입된지 30년 만에 대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기존 청약제도의 추첨제는 누구나 분양시장에 뛰어들 수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2004년 3월 23일 서울 용산 시티파크 주상복합아파트에 청약접수가 시작되자 접수객들이 길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추첨제, 건설자금 조달 기여·가수요 유발 부작용



아파트 청약제도는 투기가 횡행했던 1977년, 공공 부문 아파트 분양방법에 구체적인 규정을 마련하면서 시작됐다. 청약관련 저축으로 민간자본을 주택건설 자금으로 끌어들여야 했던 정부는 다수가 청약제도에 가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추첨제’라는 방식을 도입했다.

청약관련 통장의 가입자가 많아야 건설재원이 늘고 분양시장도 활발해져 주택건설이 촉진되기 때문이다. 주택공급을 민간에 상당 부분 의존하는 상황에서 청약제도를 통해 공급 물량을 실수요자에게 분배한다는 목적도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기존 청약제도는 주택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적시에 '새 집'을 공급하지 못했다. 추첨제라는 방식의 한계 때문에 신청자들은 운이 좋아야 주택을 분양받을 수 있었고, 누구나 분양시장에 뛰어들면서 사실상 가수요자들을 끌어들였다. 지난 30년 동안 정부가 투기적 가수요를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근본적 성공을 거두지 못한 또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선착순 분양 아파트

1977년까지만 해도 아파트 분양은 공공자금으로 짓는 아파트에 한해 ‘공모’한다는 두루뭉술한 내용으로 돼 있었다. 당시 아파트 분양에는 선착순이나 번호표 추첨 등의 방법이 주로 이용됐는데 문제가 많았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가 북새통을 이루거나 번호를 조작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아파트 수요가 급증한 1970년대 중반 이후 이른바 ‘투기부인'이 등장하면서 강남과 여의도 지역에 본격적인 아파트 투기가 발생했다. 아파트 경기는 1977년 초부터 되살아나기 시작해 3월쯤에 이르자 극심한 과열 양상으로 치달았다. 투기꾼은 공공, 민영아파트를 가리지 않고 몰려들었는데 이들의 투기행태는 연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1명의 투기꾼이 100가구 신청도

1977년 3월 15일 서울 여의도 목화아파트 분양에 몰린 투기꾼을 다룬 1977년 3월 16일자 조선일보.

대표적인 것이 1977년 3월 15일 서울 여의도 목화아파트 분양. 이날 모델하우스 옆 공개추첨 현장에는 신청자 4000여 명이 몰려 희비가 엇갈렸다. 이들 중에는 ‘10가구를 신청했는데 하나도 안됐다’고 아쉬워하는 사람, ‘하나를 신청한 사람은 볼 것도 없다’며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투기꾼은 현금 2억원을 동원해 100가구를 신청해 주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당시 제조업 근로자 86.8%가 5만원 이하의 월급을 받았고 쇠고기 한 근의 가격이 1700원 가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액이었다.

주택공사 등이 건설하는 공공부문 아파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4월 초 신청을 접수한 서울 화곡동 주공아파트는 평형에 따라 96대 1에서 178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경쟁률이 높아지자 주공은 투기꾼의 가수요를 막기 위해 신청자마다 주민등록증을 확인, 2중 신청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투기꾼이 집 없는 사람을 동원해 10여 개 이상 신청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여러 가구를 신청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럴수록 실수요자가 분양받을 확률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공공주택 청약 1순위제 도입

연일 언론에서 아파트 투기와 관련, 관련 제도를 정비해 실수요자에게 아파트를 공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청와대의 기침소리에 전국이 놀라던 시절이었다. 급기야 건설부는 1977년 4월 공공아파트의 분양방법을 내놓는다.

가족이 있는 무주택 세대주에게 ‘국민주택청약부금’ 가입자격을 주고 한달에 한번씩 6회 이상 넣어 50만원 이상이 된 사람을 아파트 청약 1순위로 정한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부금에 가입할 때 가옥대장과 주민등록등본을 확인, 무주택자만 가입하도록 했다.

청약부금 가입자에 공공주택 분양 우선순위를 주는 청약제도 실시를 알리는 1977년 4월 22일자 경향신문.

그러나 민영아파트는 여전히 투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신동식 당시 건설부장관은 1977년 6월 29일 국회 건설위원회에 출석해 민영아파트 투기 대책을 묻는 신민당 양해준 의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종의 궁여지책이랄까 기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결론이 안나옵니다. 아직도 검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방법으로 주민등록등본을 제시하게 했습니다. 세무조사의 근거로 남긴다면 전매 등의 투기는 상당히 억제될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분양 직후 팔아넘기는 아파트

10월 초 국회 본회의에 출석한 신 장관은 청약제도를 민영아파트에도 확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공공자금을 쓰는 민영아파트 혹은 주택공사의 아파트에 대해서는 주민등록등본과 가옥대장 등을 확인하고 이를 KIST에 의뢰, 컴퓨터로 처리해 중복추첨을 방지하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단 이것은 공공자금을 쓰고 있는 민영주택업자나 주공에 한하고 있기 때문에 (이외의) 민영아파트 문제는 주택건설촉진법을 개정한다면 강력히 규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듬해 2월 청약제도는 민영아파트로 확대된다. 1세대 1구좌를 원칙으로 국민주택청약부금 및 청약예금에 가입해 일정기간 일정액을 납입하면 1순위를 준다는 취지였다. 한번 당첨된 사람은 3년간 다시 당첨될 수 없도록 주택은행 컴퓨터센터를 통해 서울 지역의 아파트 추첨을 실시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하지만 민영아파트 부분에는 전매 금지 조항도 없었고 무주택자에 한한다는 조항도 없었다. 청약자를 줄 세워 가수요자를 배제하는 등 투기를 막을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었지만 오히려 돈 있는 이들에게 먼저 분양기회가 돌아간다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계장이었던 김종만 씨의 회상이다.

"세상이 시끄러웠습니다. 장관 이하 주택국장, 과장, 사무관까지 이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청약제도는 투기를 없애기 위해 만든 ‘줄 세우기’였습니다. 그런데 공공 부문을 규제하자 민영아파트가 난리였습니다. 그래서 민영 부문으로 확대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규제하면 민간 건설사의 공급량이 줄어들 우려가 있어 전매 금지 등의 강력한 규제는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아파트 투기는 강남과 여의도 등 서울 일부 지역의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그렇게까지 투기에 발 벗고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부동산 경기 나쁘자 전매금지 완화

청약제도는 투기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었다. 아파트 투기는 1978년 8월 8일 강력한 부동산 진정대책으로 잦아들었다가 1982년 금리인하 등 정부의 경기부양책으로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김종호 당시 건설부 장관은 1982년 11월 11일 국회 건설위원회에 출석, 아파트 투기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제가 1월 4일 장관으로 취임한 뒤에 가장 큰 문제가 미분양 아파트였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1만4000호에 달하는 미분양 아파트를 빨리 분양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솔직히 많은 역점을 두었습니다. 공공부문 아파트 전매금지 기간을 1년에서 6개월로 줄이고 금리를 인하하고 양도세 등 세금을 낮췄습니다."

1982년 6월과 8월 사이에 있었던 주공의 과천 2·3차 분양과 개포 3차 분양부터 시작된 투기과열은 10월 경남아파트 분양부터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11월 우성아파트 분양은 그 중의 백미였다.

김 장관의 국회보고. "지난 9월부터 이상 징후가 보여 경제장관회의를 열었으나, 모처럼 부양된 주택경기 특히 아파트경기를 죽일 수는 없다는 여론이 있어 좀더 관망하게 됐습니다. ‘좀더 과감한 조치를 했으면 이렇게 안됐을 텐데 왜 우물쭈물하고 미지근하게 엄포만 해서 이렇게 됐느냐’는 비난을 받습니다만 모든 국내경기의 최선봉인 주택경기가 한번 불이 꺼지면 3년 내에 불을 켜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공아파트도 절반이 전매

공공 자금으로 민간건설사, 주공 등이 지은 공공부문 아파트는 법으로 전매가 일정 기간 제한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조사를 해보니 과천, 개포 지구 주공아파트 5880세대 중 절반가량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김 장관의 보고는 이어진다. "이것을 몰랐느냐 주공에 추궁하니 ‘어떻게 하면 분양을 많이 시킬까’에 정신을 쏟았고 여러 가지 권한에 제약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 분양을 받아 입주하는 날 전매자와 함께 와서 주공 직원에게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등록까지 시켜놓습니다. 그런 뒤 전매자에게 웃돈을 받고 열쇠를 넘깁니다.
하루 200~300호가 입주하는 상황에서 제한된 인원으로 모조리 확인할 수도 없고 수사권도 없어 이를 일일이 색출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0순위 청약통장의 등장

불법전매는 주로 청약통장 거래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종종 황당한 사건도 발생했다. 서울에 살던 이모(당시 64세)씨는 1981년 친구 소개로 알게 된 김모(당시 31세)씨에게 20만원을 받고 청약저축통장 가입명의를 빌려줬다. 김 씨는 매달 10만원씩 28회 납부했다가 통장을 다른 이에게 넘겼다. 수차례 전매를 거친 끝에 최종 소지자가 1983년 7월 서울 강동구 고덕동 주공아파트에 당첨됐다.


그런데 중도금과 잔금이 들어오지 않았다. 주공은 통장명의자인 이 씨를 찾아 중도금 등을 독촉했다. 이 씨는 배짱 좋게도 자신이 잔금을 치르고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 뒤 통장의 최종소지자가 나타나 ‘집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이씨는 "명의를 빌렸던 김 씨가 자신을 속였다"며 허위 고소를 했다. 결국 이 씨는 무고혐의로 구속됐다.

전매 제한 조항이 없었던 민영아파트에 대한 투기는 더욱 극심했다. 투기세력은 ‘0순위’ 통장으로 몰려들었다. 0순위란 1978년 정부가 민영아파트 청약예금 가입자 중 6회 이상 떨어진 장기낙첨자에게 우선당첨권을 주었던 것을 말한다. 민영아파트 청약제는 일정 금액 예치 뒤 3개월이 지나면 누구나 같은 청약기회를 줬다.

이 때문에 극심한 경쟁률을 보였고 ‘억세게 재수 없는 예금가입자’가 등장했다. 반면 공공부문 아파트 청약자는 분기별로 구분돼 우선권을 인정받고 있었다. 0순위 제도는 행정상의 미비를 보완하고 투기를 진정시킨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1982년 오히려 투기세력에 악용됐다.



우성아파트 0순위 프리미엄 4500만원

서울 강남지역 개포동에서 발생한 투기를 심층 보도한 1982년 11월 6일자 중앙일보.

통장 거래는 전매 과정이 간단하고 세무조사 등 사후처리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이런 장점 때문에 투기꾼은 통장거래를 선호했다. 우성아파트 분양일인 1982년 11월 4일을 앞두고 0순위 통장에 프리미엄이 천정부지로 붙기 시작했다. 불과 보름 사이에 통장 가격은 4~5배로 뛰었고 당첨된 통장은 최고 4500만원을 호가했다.

이듬해 청약제도는 대폭 강화된다. 공공부문 아파트의 경우 입주관리가 시작됐다. 입주할 때 당첨자와 계약자, 최초입주자가 동일한지 확인하고 입주 뒤에는 전매금지 기간 동안 일년에 4번 입주자 실태를 조사해 위반자는 퇴거하도록 했다. 재당첨 금지 기간도 5년으로 늘어났다.

민영아파트에 대해선 투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실거래가와 분양가의 차이가 심한 지역의 경우 채권입찰제를 도입했다. 채권금액이 높을수록 분양아파트에 프리미엄이 적게 붙게 되고 결국 차액을 노린 전매 행위가 줄어들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0순위 제도는 폐지했다.


"기자분들이 0순위 피해자"


0순위 제도는 폐지했지만 기존 가입자의 기득권 문제가 남았다. 1983년 2월 28일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무소속 조형부 의원은 "이발사에 목을 내밀고 운전사에 생명을 맡기듯 정부 정책을 믿는 단 한 사람의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라"고 요구했다.

민한당의 김형래 의원도 대책을 촉구했다. "국회를 출입하는 기자분이 민한당의 경우 약 30여 명입니다. 그 중에서 약 다섯명 가량이 선의의 0순위자입니다. 쟁쟁한 매스컴의 정치부기자들이 지금까지 0순위를 활용 못했을 때 일반 소시민들의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주택정책을 보도하는 기자들부터가 피해자올시다."

정부는 1983년 9월까지 경과조치를 뒀다. 거래가 여전히 발생하자, 거래를 막기 위해 국세청은 0순위 통장 소지자에 대해 조사를 실시했다. 그러자 자신의 통장을 갖고 있는 마지막 매입자를 찾으려는 사람이 늘어났다. 10번 이상 전매된 경우도 있어 판매자와 마지막 소지자 간에 연락이 닿기가 쉽지 않았다. ‘통장을 돌려달라’는 부탁을 거절하는 이들도 있어 판매자는 자신이 받았던 프리미엄에 웃돈을 얹어 되사기도 했다.



당첨 발표 20분 만에 "자 매물 나왔습니다"


부동산 투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중앙일보 1984년 4월 26일자는 서울 가락동 현대아파트 모델하우스 앞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발표를 보러온 300여 명의 인파를 비집고 10여 명의 투기꾼들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 매물 나왔습니다. 매물. 48평, 59평 매물 나왔어요." 당첨자 발표가 나온 지 불과 20분 만이었다.


이들은 청약에서 떨어진 이들의 전화번호를 현장에서 확보, 전화를 돌리기도 했다.

"500~700만원의 프리미엄만 부담하면 됩니다. 손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세금관계나 명의이전도 깨끗하게 해드립니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정부는 갖가지 노력을 펼쳤다. 건설부는 1984년 청약제도를 강화, 재당첨 금지기간을 늘렸고 청약통장 전매를 금지했다. 무주택자 위장을 막기 위해 무주택 기간이 1년 이상인 사람에게만 청약저축 가입자격을 부여했다. 또한 전용면적 18평 이하 공공부문 아파트를 분양할 때 3년 이상 무주택자에게 우선순위를 주었다.

민영아파트 부분도 건설부는 많은 돈을 예치한 사람이 작은 평수까지 청약할 수 없도록 해 적은 돈을 예치한 서민의 기회를 보장했다. 다른 정부 부처도 투기와의 싸움에 동참했다. 국세청은 거의 매년 아파트당첨권 전매자에 대한 추적조사를 강화, 전매자에 강도 높은 세금을 매겼다. 법무부는 전국의 공증인에게 불법 전매에 이용되던 공증을 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주택청약 가입자 192만명


1990년 7월 6일 국회 건설위에서 민자당 황대봉 의원은 정부의 주택정책을 비난했다. "지난 1988년 말 주택청약저축·예금에 가입한 인원이 83만명이던 것이 1990년 2월말 192만명으로 늘어 아파트 분양 당첨의 날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중 청약저축 가입자만 해도 117만여 명이며 가입한 지 8년이 넘는 사람이 2600여 명이고 10년 이상 된 사람도 46명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권영각 당시 건설부장관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전국의 청약저축가입자수는 올해 6월말 현재 125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1992년까지 이들에게 전부 공급하는 것은 재원과 택지, 기술 등의 한계로 사실상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러나 정부는 청약저축 1순위자가 소형 민영주택 분양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습니다. 아울러 200만호 주택건설이 끝나면 청약저축가입자에게 보다 많은 주택을 공급할 수 있도록 계획에 충분히 반영하겠습니다."



장기 낙첨자 집회 갖고 "집을 내놔라"

장기간 청약저축을 납입하고도 아파트를 분양받지 못한 가입자의 불만을 소개한 1991년 4월 21일자 중앙일보.

1년 뒤 청약저축 가입자의 불만은 폭발했다. 1991년 4월 20일 명동성당 앞. 주택청약 가입자 중 7년 이상 장기낙첨자들이 모인 집회가 열렸다. 이날 이들이 내건 주장은 오로지 하나, "집을 내놔라"는 것이었다. 1984년 명칭이 바뀌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청약저축의 이름은 선매청약저축이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가 가입자에게 전용면적 25.7평 이하 아파트를 우선적으로 공급해주기로 약속해놓고 지금까지 지키지 않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12월에는 실력행사로 이어졌다. 12월 3일 서울 도시개발공사가 짓는 분양아파트 청약접수 현장에 모인 장기낙첨자들은 ‘정부의 잘못된 주택정책으로 우리들만 피해를 입고 있다’며 항의하는 소동을 벌였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주택보급률이 최저였던 시절 집권한 6공화국 정부는 국민의 불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정부는 신도시를 통해 공급물량을 확대하는 한편 집권 초기부터 실수요자에게 주택을 공급하고자 청약제도를 대폭 개편했다.

1989년부터 시작된 청약제도 강화는 1992년까지 이어졌다. 1989년 건설부는 아파트 당첨 경험이 있는 사람을 모두 1순위에서 제외하는 한편 민영아파트의 당첨권 전매를 금지했다. 이듬해에는 민영아파트 1순위에서 1가구 2주택 이상 세대주를 제외하고 민영아파트 공급물량의 일부를 무주택 서민에게 우선 배정했다. 남편과 아내 등 세대주와 세대원의 주민등록이 달라 한쪽이 무주택자로 위장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 무주택 범위를 세대원 전체로 확대했다.

1991년에는 민영아파트 1순위에서 1가구 1주택자 중 대형주택 소유자까지 제외하는 강수를 두고, 이를 뒷받침할 주택전산망도 가동했다. 민영아파트를 무주택 서민에게 우선 배정하는 범위도 대폭 확대했다. 이듬해에는 민영아파트 전매를 제한했다.



"서울대 법대 교수 5번 만난 뒤 민영 전매제한 조치"


당시 건설부 주택국에서 주택공급규칙을 담당했던 김홍배 씨의 말이다. "당시 공공부문 주택은 제한기간에 전매하면 2년 이하 징역 등의 처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민영아파트는 10배에 달하는 차익을 남기고 전매를 해도 이를 막는 규정이 없어서 불공정하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당시 서울대 법대 교수를 5번 가량 만나 법리상의 문제점을 해결한 뒤 민영주택에도 일정 기간 전매를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과열청약을 막기 위해 20배수제도 실시했다. 20배수제란 민영아파트 분양세대 20배에 해당하는 장기예치자에게 청약기회를 주는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에는 20배 이외의 가입자는 청약조차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서울시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1995년 동시분양제를 도입했다. 개별 분양되던 공급물량이 모이면 분양세대가 많아지고 청약기회를 얻는 이들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100세대를 분양하면 2000명에게 돌아가던 청약기회가 1000세대를 분양하면 2만명에게 부여되는 식이다. 곧 청약과열이 식으면서 미달사태가 발생하자 배수제의 범위는 계속 늘어나 1997년에는 250배수까지 적용됐다가 1999년 폐지됐다.

 

서울 지역 아파트 동시분양 접수가 시작된 2002년 1월 8일 주택은행 불광동 지점 아파트 동시분양 신청창구가 청약자들로 만원을 이룬 가운데, 대기자 표시 전광판이 205를 나타내고 있다.

 

외환위기로 청약제도 크게 완화


IMF 외환위기는 청약제도의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건교부는 1998년 기존 당첨자와 대형주택 소유자를 민영 1순위에서 제외했던 규정을 폐지했고 재당첨 금지 기간도 완화했다. 이듬해에는 민영 부분에서 2주택 이상 소유자를 1순위에 포함시키는 한편, 집 없는 서민 가입자에게 민영아파트 일부를 우선 분양하던 제도도 폐지했다.

청약통장이나 분양권, 주택 전매제한도 폐지했다. 2000년 건교부는 민영아파트 청약자격을 20세 이상으로 확대, 20년 넘게 이어졌던 1세대 1구좌 원칙까지 폐기했다. 불경기로 위축된 주택수요를 진작한다는 명분이었다.



'떳다방'의 전성기, 청약통장이 '복권'

부작용은 곧 나타났다. 2002년 2월 6일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한나라당 권기술 의원은 정부의 주택정책을 질타하고 있었다. "분양권 전매허용, 청약가입제한 철폐, 세금감면 등 경기부양을 명분으로 정부가 주택에 대한 가수요를 부추겼습니다. 게다가 저금리까지 더해져 주택이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떳다방이 분양시장을 좌지우지하면서 서민들이 막대한 프리미엄을 떠안고 있습니다.


떳다방의 폐해는 1999년부터 제기됐지만 (정부는) 분양시장 활성화를 위한 필요악이라며 뒷짐을 지고 있다가 뒤늦게 투기세력을 잡겠다며 뒷북을 치고 있습니다. 서민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경기를 부양하는 것이 자칭 국민의 정부의 주택정책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도적 보완 없이 과열된 주택시장을 안정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1월 현재 77만명 선인 수도권 청약 1순위자가 3월에는 137만명, 4월에는 184만여 명으로 급증할 전망입니다. 천문학적인 청약전쟁이 예고돼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 6월까지 1순위자 80여 만명이 추가로 늘어날 전망입니다. 청약통장이 말 그대로 청약복권으로 전락했습니다. 당첨만 되면 가만히 앉아서 수천만원씩 프리미엄이 떨어지는 청약복권이 된 것입니다."

정부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다. 임인택 당시 건교부 장관의 답변이다. "10년 가도 청약 안 되는 사람도 있고 굉장히 불평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주택경기도 죽이지 않고 할 수 있느냐에 대해 회의를 수도 없이 하고 있습니다. 곧 복합적인 것을 종합해서 대안을 마련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후 관련대책이 쏟아졌다. 대부분 IMF 외환위기 때 폐지했던 내용을 되살린 것이었다. 공공부문 아파트는 무주택자에게 우선 공급되고 있었던 까닭에 대책은 대부분 민영아파트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2002년 4월 주택공급규칙 개정을 통해 건교부는 투기과열지구 지정제를 도입하고 또한 투기과열지구 안에서는 민간건설업자가 공급하는 아파트 중 일부를 장기 무주택 세대주에 우선 공급하도록 했다.

9월에는 투기과열지구 안에서 모든 아파트의 분양권 전매를 주택공급계약일로부터 1년까지 금지했다. 10월에는 민영아파트 청약 1순위 자격을 다시 제한했는데, 투기과열지구에 한해 과거 5년 이내 당첨자, 세대주가 아닌 사람, 1가구 2주택 이상 세대주를 청약 1순위에서 제외했다. 2003년 6월에는 전매 제한을 소유권 이전 등기를 완료하는 때까지로 확대했다.

 

2005년 5월 판교신도시 등 인기지역 당첨확률이 높은 주택청약통장을 불법매매·알선한 혐의로 부동산 중개업자와 투기꾼, 청약통장 가입자 등이 무더기로 경찰에 적발됐다. 사진은 불법거래된 청약통장.

 

 

"처음부터 강한 앰플 주사를 쓰면 안 된다"

당시 건교부 주택정책과장이었던 강팔문 씨의 말이다. "부동산 침체기에서 회복기로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당시 청약 과열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럴 경우 투기꾼이 몰려들고 집값이 상승하고 분양가도 상승합니다. 주택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택이 공급되지 않는 겁니다.
투기과열지구를 도입하고 이 지역 내 민간건설업자가 공급하는 무주택 서민에게 우선 공급했습니다. 전매제한 조치와 청약 1순위 제한 조치는 정부 정책의 신뢰 문제도 있고 해서 망설이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열이 줄어들지 않아 미리 세워둔 시나리오대로 조치했습니다.


투기적 수요를 막으면서 정상적인 주택시장은 확보하기 위해 시장 상황을 봐가며 단계적으로 조치를 취했습니다. ‘강한 앰플 주사를 써서 전체 주택산업을 마비시키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정부 안에 형성돼 있었습니다."

이어 무주택 세대주를 우선으로 청약제도가 바뀌었다. 2004년 1월에는 투기과열지구 내 민간건설업자가 공급하는 아파트 가운데 장기 무주택 세대주에게 우선적으로 공급하는 양을 대폭 늘렸다. 분양가상한제가 재도입된 2005년 3월에는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는 공공택지 내 민영아파트도 장기 무주택 세대주에게 우선 공급하도록 했다.

투기꾼이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 전매제한도 강화했다.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되는 공공택지 아파트에 대해 최대 5년 동안 적용됐던 전매 금지가 2005년 12월에는 최대 10년으로 늘어났다.

 

2005년 8월 31일 한덕수 당시 경제부총리가 경기도 과천 재경부 브리핑룸에서 ‘부동산대책 관계부처 합동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이날 청약가점제 도입이 세상에 알려졌다.

 

2007년 9월 청약가점제 도입…청약제도 일대 혁신


그리고 2007년 9월 청약제도는 대변화를 맞이한다. 모든 아파트의 청약에 기존의 추첨식 대신 청약가점제를 적용하도록 개편된다. 이전 추첨제에서는 유주택자라도 청약에 당첨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청약가점제 하에서는 당첨을 기대하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무주택자에게 공급물량의 일부를 우선 공급했던 기존 제도보다 강력한 조치다.

이와 함께 전매차익을 노린 투기꾼을 막기 위해 공공택지에 건설되는 아파트는 최대 10년, 민간택지 아파트는 최대 7년 동안 전매를 금지했다. 투기꾼을 배제하고 실수요자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하겠다는 지난 30년 동안의 '씨름'이 마침내 달성된 셈이다.

‘불임시술자 우선’에서 ‘다자녀 가구 먼저’로

 


인구정책과 청약혜택 변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대표되는 산아제한이 국가적인 목표였던 1976년 11월 경제기획원은 제4차 5개년경제개발계획 기간 동안 연평균 인구증가율을 1.6%로 억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자녀를 2명만 가진 이에게 주택공사 등이 짓는 아파트의 우선추첨권을 주기로 했다. 이 결정이 공공부문 아파트청약의 영구불임시술자 우대 근거가 된다.

1977년 청약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됐을 때 공공부문이 짓는 아파트 청약 우선순위는 경제기획원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돼 만들어졌다. ‘국민주택청약부금’에 가입, 한 달에 한 번 6회 이상 납입해 50만원 이상이 된 사람을 1순위로 하되, 경쟁이 있을 때에는 해외근로자이면서 영구불임시술자, 영구불임시술자, 해외취업근로자의 순서대로 분양대상자를 정하도록 했다.

 

주공의 반포아파트 주택전시관에 몰려든 불임인파를 다룬 1977년 9월 15일자 조선일보.

경제기획원의 조치는 적중했다. 1976년 말까지 8만여 명에 불과했던 영구불임시술자가 1977년 8월말 14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우대 방침이 처음으로 적용된 주공 반포아파트 분양공고가 난 뒤 증가세가 더욱 두드러져 하루 평균 700~800명씩 늘어났다. 1977년 9월 14일 반포아파트 주택전시관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찼다.

김모(당시 35세)씨는 아침 일찍 신청장소에 나왔다가 불임시술자가 예상외로 많자 집으로 돌아가 부인에게 불임시술을 받도록 한 뒤 증명을 받아와 청약을 신청했다. 박모(44·여)씨의 사연은 눈길을 끌었다. 5년 전 수술을 받았다는 그는 병원이 사라지고 없어 적십자 병원에서 ‘무난자증명서’를 받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무난자’가 선천적인 것인지 불임시술에 의한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공 직원은 박씨에게 아들이 있는 것을 주민등록표로 확인한 다음에야 접수를 받았다. 단 조건이 붙었다. 다른 국공립병원에서 ‘불임시술에 의한 무난자 확인증’을 받아와야 한다는 것.

불임시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후순위를 받은 박모 할아버지(71)는 "45세 이상의 사람들은 효과가 없다고 보건소에서 무료로 시술을 해주지 않는데 순위에서 차별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늙은 사람은 아파트에 살아보기도 힘들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1997년에서야 영구불임 시술자 우대 폐지

어떤 신청자는 "아들 딸 둘만 낳아 가족계획을 철저히 했다"며 "같은 불임시술자라도 아이들이 4~5명이 있는 신청자와 자신에게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날 주택전시관에는 문의전화도 잇달았는데, ‘과부도 수술을 해야 하느냐’, ‘폐경기인데 무슨 불임시술이 필요하냐’ 등의 내용이었다. 이처럼 영구불임시술자의 아파트 청약 우선권이 ‘실증’되자 청약통장에 20~50만원 가량의 프리미엄이 붙을 때에도 영구불임시술자 명의의 청약통장에는 20만원의 프리미엄이 더 붙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당시 남성의 불임시술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많이 이뤄졌다. 원모씨는 1988년 7월 경기도 강화군의 한 예비군 훈련장에서 대한가족계획협회의 권유로 정관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이듬해 9월 세 번째 아이를 출산했고 아파트 우선권을 못 받게 됐다. 원씨는 이에 대한가족계획협회를 상대로 15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판결이 난 것은 1990년 12월. 당시 서울지법 남부지원 민사합의2부는 ‘수술이 잘못됐다는 증거가 없고 시술 3개월 뒤 정기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담당의사가 고지했는데도 이를 태만히 한 점이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불임시술자에 대한 우대조치는 199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1996년 6월 4일 김양배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김영삼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에서 "35년간 시행되어 온 출산조절을 통한 인구억제정책을 폐기하겠다"며 "연내 관계부처와 협의, 불임시술 가정에 대한 공공주택 우선 입주권 등의 혜택을 없애겠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1997년 7월 18일 ‘주택공급규칙’이 개정되면서 영구불임시술자 우대조치는 삭제됐다.

그로부터 9년 뒤인 2006년 정부의 인구정책은 다시 주택청약제도와 연결됐는데 이전과는 정반대였다. 건교부는 2006년 8월 주택공급규칙을 개정, ‘민법상 미성년자인 3명 이상의 자녀를 둔 무주택 세대주에게 건설량의 3% 범위 안에서 1회에 한해 특별 공급할 수 있다’고 정했다.

그 첫 적용은 2006년 8월 판교 신도시 분양. "21세 군인, 19세 대학생, 17세 고등학생을 둔 세 자녀 가구인데 아무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등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2007년 9월 도입될 청약가점제에선 자녀수가 많은 것이 상당한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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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에 거래되는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책이 절판돼서 살 수가 없어서 비싼 값에 중고거래하시고,
국회도서관에 몇 만 원씩 줘서 제본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원래 이 책 자체가 정부부처 사이트에 올라왔던 내용을 엮은 것뿐입니다.
좋은 자료이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치솟는 분양가, 어찌 하오리까"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⑬]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특별기획팀 2007.03.13

분양가 규제 도입의 필요성을 주장한 1977년 10월 11일자 중앙일보 사설

 

"금년 들어 가장 폭등한 것이 아파트값이라 할 수 있다. 3월에 평당 40만원 선이던 아파트 분양가가 9월 들어 60만원을 돌파했다. 다른 공산품의 경우는 10% 이하로 가격을 인상하려 해도 정부의 심한 규제를 받는데 아파트의 경우는 분양가가 50% 가까이 올라도 별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 아파트값 안정은 경제적 측면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도 큰 비중을 갖는 만큼 정부는 여기에 좀더 신경을 쓰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977년 10월 11일 중앙일보 사설)


30년 전 일간지에 실렸던 신문 사설이지만 2007년에도 의미 있는 내용이다. 정부가 아파트 분양가의 일방적인 상승을 규제하는 민간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는 1977년 처음 실시됐다. 이 제도는 국회에 계류 중인 주택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2007년 9월 다시 도입된다.

빈약한 재정으로 주택공급을 민간에 의존해야만 했던 정부는 주택건설을 촉진해야 할 때마다 분양가를 자율화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아파트가 전 국민의 주거형태로 각광받기 시작한 1970년대 중반 이후 분양가 자율화는 예외 없이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가격이 비싸지면 수요가 줄어들어야 하지만,
미리 분양하는 아파트에는 이 같은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만성적으로 공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소비자는 고분양가 주택이라도 구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
이다.


시중에 여유자금이 남아돌고 투기심리가 팽배한 상황이라면 이는 더욱 가속화된다. 1970년대 말이 그랬고, 2000년대 초도 그랬다. 이런 이유로 30년 동안 민간아파트 분양가가 자율화돼 있던 기간은 10년 정도에 불과했다.(1981년 6월~1982년 12월, 1999년 1월~2007년 9월)


분양가를 획일적으로 규제해도 부작용이 발생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획일적인 분양가 규제로 공급이 위축된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시 정부는 물가안정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1983년에 정한 분양가를 1989년까지 유지했다. 같은 기간 물가상승률이 25.6%에 달했는데도 주택가격을 강하게 억누른 결과로 1980년대 말 부동산 대란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분양가 자율화는 예외없이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한 주상복합 모델하우스에 몰린 청약인파

 

건설사의 폭리를 막아라 - 규제의 시작


분양가 우여곡절의 역사는 1977년 시작됐다. 1977년은 중동특수로 수출이 100억 달러를 달성하고 경상수지가 1965년 이래 12년 만에 흑자를 기록한 해였다. 시중에 넘치는 부동자금은 부동산에 몰렸다. 평당 10만원을 호가하는 프리미엄을 노린 투기꾼이 몰려 124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고, 어떤 투기꾼은 엄청난 거액인 2억원을 내어 서민용 아파트 100가구분을 분양 신청해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도 했다.

민간아파트 분양가는 아파트 투기붐을 편승해 급등함으로써 실수요자의 공분을 자아냈다. 아파트 분양가가 급등세를 보이기 전인 1977년 4월 이미 민간아파트의 분양가는 공공 부문의 아파트보다 비쌌다. 민간아파트 분양가는 지방자치단체가 짓는 아파트보다 80~100%, 주택공사 아파트보다 40%, 한국감정원의 평가보다 100~150%나 높았다. 같은 해 9월 민간아파트 분양가는 5개월 전보다 무려 30~60% 상승한 것으로 드러났다. 자연히 아파트 분양가를 규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다.

 

분양가 규제 도입을 알리는 1977년 10월 30일자 조선일보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과는 분양가를 안정시킬 대책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당시 주택정책 계장이었던 김종만 씨의 증언이다.

"주택정책과 직원 5명은 김재익 경제기획원 기획국장과 함께 다양한 정책을 고려했습니다. 업체마다 다른 분양가를 내놓지 못하도록 외장재 없이 기본 구조만 만들어 분양하는 ‘코어제’도 고려했습니다만 반응이 좋지 않아 접었습니다.

당시 공공자금으로 짓는 아파트의 분양가는 1963년부터 최고가격으로 묶어 규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민간아파트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상한제의 기준은 월급쟁이가 5~7년 정도 벌어 마련할 수 있는 금액으로 했죠. 또한 아파트의 분양가를 통제하면 비싼 토지에 대한 민간 건설업자의 수요를 억제, 토지가격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건설업체는 정부의 방침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1980년초 불황, 주택사업부서 해체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는 불황기였다. 원유 파동과 수출 감소 등으로 인한 경기침체의 그늘이 짙게 드리운 시절이었다. 여기에 1978년 8·8 부동산종합대책이 겹쳐 주택경기는 침체일로를 겪었고 미분양 아파트도 속출했다. 1981년에는 2~3년 전에 건설된 아파트 등 2000여 가구가 미분양 상태로 남아있을 정도였다. 1980년 미분양에 고민하던 한 건설업체는 아파트를 할부로 판매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건설업체들은 앞 다투어 주택사업 전담부서를 해체했다. 1981년엔 건설업체 54개 업체 중 19곳이 주택사업 전담부서를 없앴다. 부동산소개업소도 큰 타격을 받았다. 1980년 5월~8월까지 4개월 동안 서울시 부동산소개업소의 매매실적은 평균 2~3건 밖에 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문을 닫은 업소가 속출했고 일부는 ‘부업’을 찾아나섰다. 금전대출을 알선하거나 가게 안에서 담배, 필름, 우표를 팔았다. 주택시장 경기 침체는 건축자재 시장 등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한신공영 쇼크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정부는 1981년 6월 주택경기 활성화 대책에 이어 민간아파트의 분양가를 자율화했다. 곧 아파트 분양가가 급상승했다. 이 때 이른바 ‘한신공영 충격’이 나타났다. 분양가 자율화 조치 이후 처음으로 아파트 분양을 실시한 한신공영은 분양가를 대폭 인상, 사회적인 논란을 야기했다.

당시 한신공영은 68평형 등의 아파트 분양가를 평당 138만원(전용면적 기준 179만원)으로 정했다. 이는 분양가 상한선에서 22%를 올린 수준이었다. 한신공영에 자극받은 다른 건설업체들도 분양가를 인상하면서 ‘분양가 인상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기존 아파트는 기존 아파트대로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행정권고’라는 가격통제

1981년 6월 시행된 분양가 자율화는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져 사회적 논란이 뜨거웠다. 1981년 8월 13일자 조선일보

당시 언론은 분양가를 올리는 건설업체에 자제를 촉구했다. 분양가 자율화를 찬성했던 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율화가 된 이상 어느 특정 아파트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비싼들 시비를 걸 소지는 없어졌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아파트 투기붐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는 우리는 이 1억원짜리 아파트에서 ‘솥뚜껑’을 보는 놀라움을 갖는다. 1억원짜리가 동반할지도 모르는 집값의 앙등과 이로 인한 파급효과 때문이다."(조선일보 1981년 8월 13일)

사회적 비난이 비등하자 건설업체들은 모임을 갖고 자율적인 규제를 약속했다. 주택경기 활성화라는 목표를 갖고 있던 정부는 분양가 자율화 정책을 고수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건설사의 폭리와 물가에 대한 영향을 고려, 전용면적 25.7평 이상의 아파트에 대해서도 ‘행정권고’ 형식으로 실질적인 가격통제를 계속했다.

1982년은 주택경기가 냉온탕을 오간 해였다. 정부는 상반기까지 지속적으로 각종 주택수요 진작 조치를 취했다. 양도세 등 각종 세금을 낮추고 주택부금 금리를 인하했다. 5월에 이르자 주택경기가 점차 되살아났다.



퇴직금 2배 이상인 프리미엄

실질적인 분양가 통제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시중에 돈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자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꾼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표적인 예가 1982년 11월 초 문제가 된 ‘개포 프리미엄’ 사건. 복부인과 부동산업자의 결탁으로 이 지역의 아파트 값 8800만원에 프리미엄 4500만원이 붙었던 이 사건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불과 4년 전 아파트 프리미엄이 400만원 정도였고 한 달 전 프리미엄이 1600만~1700만원가량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급등세였다. 당시 일류회사 고참 부장이 15년 근무하고 받는 퇴직금이 2000만원 수준이었으니 서민의 허탈감은 대단했다.

1982년 11월 8일 오전 경제기획원 녹실에선 김준성 당시 경제부총리 주재로 부동산 투기에 대한 긴급대책회의가 열렸다. 전날인 일요일 저녁 관계 장관들에게 연락, 서둘러 소집된 회의였다. 회의는 1시간 반을 넘기며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일부 참석자들은 ‘부동산 경기가 또 꺼지면 3년은 간다’며 투기 억제보다 경기부양을 주장했다. ‘건설경기의 회복을 위해 어느 정도의 투기현상은 불가피하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당시로서는 경기부양이 우선과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회의 이후 강력한 분양가 진정대책이 나왔다.

투기를 없애기 위해선 투기꾼이 노리는 분양가와 실거래가 사이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분양가를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물가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었다. 물가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할 경우, 가격 급등으로 인한 물가 불안정이 우려됐다.

아파트 분양에 채권입찰제 도입


김종호 당시 건설부 장관은 1983년 1월 정부가 올해 물가안정을 최우선경제시책으로 삼고 각 업체가 물건값을 내리고 있는 마당에 아파트가격만 올릴 수 없다고 지적, 민간아파트에 대해서도 경영개선을 통해 인상요인을 최대한 흡수해 분양가를 억제하라고 지시했다. 이때부터 전용면적 25.7평 초과 민간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1982년 수준인 134만원으로 정해졌다.

분양가 통제를 이어가는 대신 보완책이 필요했다. 정부는 정인용 경제기획원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부동산대책실무위원회를 구성, 대책수립에 나섰다. 여기서 결정된 것이 ‘분양가 실세화’ 방침. 이 기본 방향 속에서 여러 가지 대안을 놓고 고심하던 정부는 1983년 청약제도 강화와 함께 채권입찰제를 도입한다.

채권입찰제란 국민주택채권을 많이 사는 사람에게 원하는 아파트를 분양하는 제도다. 채권을 매입한 아파트 당첨자는 당장 싼 값에 채권을 팔아도 되고 20년이 지난 뒤 연이자 2%와 함께 되찾을 수 있었다. 전용면적 25.7평 초과 민간아파트에 대해 도입된 이 제도는 건설사의 폭리를 막는 한편 단기차익을 노리는 투기꾼도 막는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1883년 4월 김종진 건설부 장관은 국회 건설위원회에 출석, 다음과 같이 말했다. "투기과열현상은 채권입찰제의 시행으로 완전 제거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를 실시할 경우 장기적으로 투기요인을 제거함으로써 주택가격의 안정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평당 분양가 134만원의 교훈


원가가 상승하면 분양가도 올려야 했지만 물가안정을 절대명제로 삼고 있었던 정부는 분양가를 올리지 않았다. 1983년 분양가 134만원은 1980년대 후반에도 그대로였다. 부작용이 나타났다. 민간 건설업체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요가 많은 수도권에 아파트 건설을 기피했다. 당시 필요한 주택건설물량은 최소한 연간 35만호였지만 1984~1987년까지 매년 지어진 집은 22만호에 불과했다.

장기간에 걸친 획일적인 분양가 통제는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주택공급 위축으로 이어졌다. 1989년 1월 14일자 중앙일보

건설업체들은 분양가 상한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오피스텔, 조합주택 등에 주력하거나 땅값이 싼 지방으로 진출했다. 그 결과 1988년 5월 이후 7개월이 넘도록 서울 지역에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민간아파트 분양이 없었다. 땅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당시 71개 건설업체는 수도권에 46만4000평에 이르는 택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시중에는 돈이 넘쳤다. 1988년은 건국 이래 최초로 3년 연속 무역수지 흑자를 달성했고 연 10% 이상 가파른 경제성장을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등은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를 넘으면 주택수요가 늘어난다고 했는데 1988년은 막 3000달러를 넘긴 해였다.

당시 청와대 경제비서관이었던 홍철 씨의 말이다. "무역수지 흑자 등으로 시중에 유동성 자금이 부동산으로 몰렸습니다. 88 서울올림픽이 끝나고 나자 부동산이 들먹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분양가 현실화’라는 폭탄선언

1988년 12월 건설부장관에 취임한 박승 건설부 장관의 ‘폭탄선언’은 타오르는 부동산 경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12월 12일 국장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박 장관은

 

"민간의 공급을 촉진하기 위해 분양가 자율화로 건설업자에게 집을 지을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당시 아파트의 평당 비용은 평당 분양가를 넘어선 상태였습니다.

정이윤을 보장해야 공급이 늘어납니다. 그래서 분양가를 현실화하자고 했습니다."

박 장관의 회고다. 이 발언은 부처 간 협의를 거치지 않은 박 장관만의 생각이었다.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과장이었던 이동성 씨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주택문제로 외부 회의에서 돌아오니 기자들이 몰려왔습니다. 장관이 분양가 현실화 발언을 했는데 내용을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던 터라 놀랐습니다."



‘하늘은 두 쪽 나지 않았다’

당시 박 장관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추진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박 장관은 간부회의 뒤 조순 경제기획원 장관을 찾아가 분양가 자율화에 대한 동의를 얻었지만 청와대의 반대에 부딪쳤다. 반대의 중심에는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이 있었다. 원칙에는 동의하지만 주택금융제도나 토지 공급 등을 완비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시기상조라는 이유였다.

박 장관은 1989년 4월 노태우 대통령을 찾아가 직접 분양가를 현실화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 장관은 비서실장을 통해 사직서를 제출했고 사표는 7월 받아들여졌다. 박 장관의 퇴진을 두고 세간에는 문책성 인사로 알려졌다.


"공산주의 세상이 더 낫다" ?

정부는 박 장관의 발언 직후 분양가 자율화 방안을 공식 부인했으나 발언의 파장은 컸다. 신규아파트 가격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존 아파트 값까지 급등했다. 1989년 4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일부 평형은 평당 1000만원대를 넘어섰다. 자고 일어나면 ‘1000만원이 올랐다’는 말이 나돌았다.

문희갑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은 주택문제가 체제를 위협할 정도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수요는 공급을 상회했습니다. 소득이 늘자 주택수요는 더욱 늘었고 투기까지 겹쳐 값이 올랐습니다. 당시로서는 체제 붕괴 위협으로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이 때문에 주택 200만호 건설을 추진하기로 하고 신도시를 물색한 것이지요."('실록 6공 경제'-중앙일보사)

당시 한 신문에 등장한 택시기사의 말은 여론을 잘 보여준다.

"가만히 앉아서 부동산 투기로 하루에 수백만원씩, 아니 수억원씩 벌어서 챙겨먹는 주부들과 부동산 투기자들이 망해서 죽어가는 꼴을 보고 난 뒤에야 내가 발 뻗고 죽을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사느니 공산주의 세상이 더 나은 게 아니겠습니까."(국민일보 1989년 5월 11일자)



건설업계의 위협, 평당 197만원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를 요구하는 민간 건설업체의 목소리를 전하는 1989년 10월 12일자 조선일보

주택공급을 늘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정부는 분당과 일산 등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민간 건설업체는 정부의 이런 점을 이용, 지속적으로 분양가 인상을 요구했다. 분당신도시 시범단지 분양을 코앞에 둔 1989년 10월 12일 민간 건설업체는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민간 건설업체의 적극적인 분당개발계획 참여가 사실상 이뤄지기 힘들 것’이라며 정부를 은근히 위협할 정도였다.

정부도 업계의 요구를 마냥 묵살할 상황이 아니었다. 정부는 분양가를 어느 정도 현실화시키면서 지나친 가격 상승은 막는 원가연동제를 도입했다. 처음으로 원가연동제를 적용받아 공급된 서울 쌍문동 한양아파트는 평당 197만원으로 분양됐다.



원가 계산 불가능한 ‘원가연동제’


원가연동제란 아파트 분양가를 택지비와 건축비 등 원가에 연동시켜 정부가 통제하는 제도를 말한다. 분양가 상한을 정부가 직접 규제하는 것보다는 완화된 제도이기는 하지만 가격을 통제한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규제 중심 정책이었다. 1990년대는 표준건축비 인상을 둘러싸고 거의 매년 정부와 업계 간 갈등이 반복했다. 표준건축비의 비현실성 등이 이유였다.

당시 주택국장이었던 이동성 씨의 말이다. "김대영 건설부 차관이 취임했을 때, 표준건축비를 인상해달라는 요구가 빗발치자 김 차관이 가격 현실화를 검토해보라고 했습니다. 건설업체쪽 사람들이 찾아왔길래, ‘분양 원가를 계산해서 가지고 오라’고 하자 만세를 부르며 돌아가더군요. 하지만 약속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새벽 2시가 되어 빈손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도급 등으로 분양원가를 계산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습니다."



건설업체를 살려라 - 분양가 완전 자율화

상황은 1990년대 중반 도산하는 건설업체가 등장하면서 조금씩 바뀐다. 삼익과 우성 등 1980년대를 풍미했던 건설업체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하도급 업체를 포함, 2만여개 업체에 200여 만명의 근로자가 생계를 꾸려가는 주택건설업계의 위기를 외면할 수 없었다. 정부는 단계적으로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하기 시작했다.

단계적으로 자율화로 대체되던 원가연동제는 IMF 외환위기 당시 일자리 공급을 위해 추진된 주택경기 부양 정책 중 하나로 완전 자율화된다. 당시 건설부 주택정책과장이었던 이춘희(현 건교부 차관)씨의 말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공식실업자만 200만 명에 육박했습니다. 그중 건설 부분 실업자가 100만명에 달했습니다. 주택경기를 살려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1998년 주택경기를 살리기 위해 취해진 수도권 분양가 자율화는 또다시 분양가 급등으로 이어졌다. ‘고분양가 → 주변 집값 상승 → 이를 바탕으로 한 고분양가’의 연쇄반응이 나타났다. 수도권 아파트 분양가 자율화가 시작된 이후 서울 지역 아파트 평균 분양가는 1998년 512만원에서 2006년 1546만원으로 급상승했다. 8년 만에 세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아파트 평당 분양가 최고액은 1999년 6월 1072만원을 거쳐 2006년 3250만원에 달했다. 2007년 1월 현재 분양가 최고액은 평당 3395만원으로 2006년 기록을 갱신했다. 분양가 규제의 목소리가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다시 원점으로 - 분양가 규제

분양가 규제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언론은 연일 분양가 상승 문제를 다뤘다. 2002년 4월 서울시는 아파트 분양가를 과다 책정할 경우, 이를 국세청에 통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는 "아파트 분양가는 자율적인 것으로 규제할 사항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아파트 분양가는 점점 올라갔다.

정부의 이러한 기조는 참여정부 초반에도 이어졌다. 2003년 10월 29일 ‘주택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10·29대책)’을 내놓은 김진표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TV에 출연, "분양가 규제는 정부 내에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주택공급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고 과거 경험으로 봤을 때 여러 부작용이 있어 이번 종합대책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남의 치마 속"

2004년 2월 서울시 도시개발공사(현 SH공사)가 분양원가 구성내역을 밝히자 분양가 논란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분양원가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시 발표에 따르면 2003년 11월 분양한 서울 상암단지 40평형의 수익률은 39.2%(3백10억원)였다.

2004년 2월 9일 오전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분양원가 공개를 총선공약으로 내세우면서 논란은 이어졌다. 당시 건교부 내에선 "남의 치마 속은 왜 보려고 하느냐"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분양원가 공개에 회의적이었다.



분양가 공개, 국민들이 바랍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은 건설교통부와 논의 끝에 ‘공공택지 내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원가연동제) 및 주요항목 부분공개’라는 결과물을 내놓는다. 2005년 3월 공공택지 내 소형아파트에 분양가 상한제가 도입됐고, 이듬해 2월에는 공공택지 내 중대형 아파트로 확대됐다.

당시 주택국장이었던 권도엽 전 건교부 정책홍보관리실장의 증언이다. "당시 분양원가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주장의 중심은 높은 분양가를 낮추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원가공개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분양가가 떨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분양가상한제를 도입하기로 했습니다.신 분양가를 충분한 수준으로 책정하고 물가에 연동시켰습니다. 과거 분양가상한제가 도입됐을 때 분양가를 올려주지 않아 건설사가 아파트 건설을 기피했던 점을 고려했던 것입니다. 당시 분양원가 공개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에서 정치적인 문제로 변한 상태라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주요 항목에 대해 원가공개를 하게 됐습니다."



계속된 논란에 당정 모두 부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판교 신도시 분양과 은평 뉴타운 분양 논란이 이어지면서 고분양가 시비는 다시 불붙었다. 민간아파트에 대한 분양가공개 요구 목소리가 높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9월 28일 방송에 출연, "제가 (예전에는) ‘신중하자’며 원가공개에 대해 반대의견을 표명했는데 지금은 국민들이 제 생각과 달리 모두 공개하는 것이 좋겠다고 바라니까 그 방향으로 가야 되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2007년 1월 11일 오전 국회에서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김근태 의장과 강봉균 정책위의장, 한명숙 총리, 권오규 경제부총리, 이용섭 건교부 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당정협의를 열고 민간아파트 분양 원가를 수도권, 지방의 투기과열지구에 한해 공개하기로 했다. 2006년 12월 22일 민간아파트에 대한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한 상황에서 나온 합의였다.

정부측에서는 전반적인 주택가격 안정에 분양가 상한제가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분양원가 공개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선분양제인 현재 상황에서 원가를 정확하게 계산하기 어렵고 분쟁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까닭에서였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지속적으로 분양원가 공개를 요구해왔다. 원가 공개를 하지 않는다면 도입하기로 한 분양가 상한제의 실효성이 퇴색한다는 주장이었다.

당정은 모두 부담을 갖고 있었다. 2006년부터 계속된 논란으로 부동산 시장에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정 끝에 전체 민간아파트 대신 수도권 및 투기 과열지구에 한해 분양원가 일부를 공개한다는 접점을 찾았다. 권 부총리는 이날 "분양원가를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와 분양원가 공개가 공급을 위축시켜 공급을 위축시켜 시장불안을 가중한다는 우려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합리적인 수준에서 민간택지 내 분양원가 공개 방안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2007년 3월 2일 국회 건교위에서 조일현 위원장이 민간택지 분양가 내역 공개와 분양가 상한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주택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있다.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주택법 개정안은 국회에 제출됐으나 2007년 3월 2일 국회 건교위에서 수정됐다. 논란이 된 부분은 분양원가 공개의 범위. 원안은 ‘수도권 및 투기과열지구’에 적용하도록 규정했으나, 수정안은 ‘수도권 등 대통령이 정하는 지역’에 한해 공개하기로 했다. 또한 분양원가공개라는 이름 대신 ‘분양가내역 공시제’를 사용하기로 했다. 수정안은 2007년 3월 현재 국회 본회의를 앞두고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분양가 규제 역사의 교훈 "아파트는 다른 상품이다"


분양가의 역사는 획일적 규제와 자율화가 가져온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격 안정을 위해 분양가를 획일적으로 규제하면 공급이 줄어드는 한편 시세차익을 노린 투기꾼이 몰려들어 가격이 올라갔다. 반면 공급을 늘리기 위해 분양가를 자율화하면 분양가 급상승, 그리고 전반적인 집값 상승을 가져왔다.

1981년 분양가 자율화가 문제됐을 때 동아일보는 8월13일자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율화 뒤 분양가가 급등하는) 시점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문제된 아파트 분양가의 적정 수준 여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다. 아파트는 시장의 수급에 따라 적정 가격이 결정되는 다른 상품과는 다르다. 분양가가 지나치게 높게 책정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한편으론 자율화가 노린 장점을 최대한 살려나가도록 유도해가기 바란다."
주택 공급에 민간의 손을 빌려야 하는 구조적 상황 속에서 정부는 ‘값싼 주택 공급 촉진’이라는 난제에 여전히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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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에 거래되는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책이 절판돼서 살 수가 없어서 비싼 값에 중고거래하시고,
국회도서관에 몇 만 원씩 줘서 제본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원래 이 책 자체가 정부부처 사이트에 올라왔던 내용을 엮은 것뿐입니다.
좋은 자료이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②] 타워팰리스가 양도세 면제받은 까닭

부동산투기 억제세에서 실거래가 과세까지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⑦] 오락가락 양도세의 역사

특별기획팀 2007.02.22

2001년 초 건설업계에서 시작된 양도세 폐지론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해 2월1일 여당인 민주당의 남궁석 정책위의장이 한국주택협회가 주축이 된 건설업계와의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이방주 현대산업개발 사장은 "양도소득세는 부동산 투기 억제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2000년 말 현재 주택보급률이 94.8%에 이르는 등 주택이 이미 투기대상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했으므로 양도세는 즉각 폐지돼야한다"고 주장했다. 정종득 벽산건설 사장도 "주택 수요 억제를 위한 양도세 부과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했다.

이로부터 석 달 뒤인 5월5일 ‘부동산 양도소득세 제도가 지난 75년 입법화된 후 26년 만에 전면 개편된다’는 <한국경제신문>의 보도가 나오더니, 5월10일 재정경제부가 "현행 부동산 세제는 투기억제를 목적으로 운용되고 있으나 주택보급률이 94%에 달하는 현 시점에서 부동산 투기 바람이 다시 불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선진국처럼 보유세 위주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히기에 이른다.

다음 날, 한나라당 주요 당직자회의에서 김만제 정책위의장은 "현행 양도세법은 잦은 개정과 수많은 예외사항 등으로 완전히 누더기가 됐다"며 "주택보유율이 80%를 넘어선 현 시점에선 부동산 투기의 위험도 줄어들었고 주택거래의 활성화를 위해 양도세는 폐지돼야한다"고 말했다.

 

양도세 비과세의 공방전

그러나 2년 뒤인 2003년5월 예상치 못한 ‘반격’이 일어났다.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1가구1주택에 대해 양도세 비과세 혜택을 주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외국처럼 1주택이든 2주택이든 모든 주택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이 조세원칙에 맞다 "고 밝혔다. 1가구1주택 비과세는 정부 수립 후 금지옥엽처럼 지켜온 금기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경제 정책의 수장이 양도세 폐지론은 커녕 ‘예외 없는 과세’라는 칼을 치켜든 것이다.

언론과 한나라당 대표는 물론이고 여당 정책위 의장까지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이 사태는 7월21일 민·관 위원으로 구성된 세제발전심의위원회에서 "아직은 서민들의 내 집 마련 성격이 강한 만큼 (1가구1주택에 대한) 양도세 부과는 시기상조"라고 의견을 모으면서 사실상 백지화했다.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김진표 부총리는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 폐지는 실거래가 과세제도가 정비되는 시점에 논의될 수 있을 것"이라고 또 다시 언급했고, 11월에는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이 "장기적으로 1가구1주택도 양도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또 2년 뒤인 2005년3월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에게 ‘2005년 업무계획’을 보고하면서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제도를 언제 폐지할지 구체적인 일정은 상반기 중에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양도소득세의 탄생과 그 숙명

비록 국민의정부 말기와 참여정부 초기라는 편차가 있지만, 많은 세제 중에 유독 양도세를 놓고 불과 2년 만에 입장이 왜 이렇게 달랐던 것일까.

양도세는 부동산 양도로 실현된 자본이득을 과세대상으로 하는 비정기적, 자발적 조세이지만 부동산경기를 조절하는 정책조세적 성격을 강하게 띠어왔다.

활황기에는 세율인상, 과표인상, 비과세감면축소를,

불황기에는 그 반대 방향으로 경기를 조절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다.

태생부터가 그랬다. 부동산의 양도차익에 대한 세제가 처음 마련된 것은 1967년 11월 제정·공포된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세법’이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도시로의 인구집중 경향이 나타났고, 덩달아 토지 가격이 많이 올랐다.

이에 ‘부동산투기억제세’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난 게 양도세의 출발이었다. 투기억제세는 개인과 법인의 토지양도차익에 대하여 50%의 단일비례세율을 적용했다. 다만 1세대1주택에 부수된 토지로 건물 면적의 10배 내에 이르는 토지는 면세대상으로 했다.

‘부동산투기억제세’가 지금과 같은 양도세의 모양새를 비로소 갖춘 것은 1974년. 종합소득세 제도를 도입하면서 종합소득세와 분리과세하는 양도소득세법을 새로 만들었다. 양도소득세법이 투기억제세를 흡수한 것이다. 특기할만한 건, 과세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건물양도차익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된 반면 물가상승률만큼 취득가액에 더해 공제해 주도록 했다는 점이다.

투기억제든, 건설경기부양이든 양도세가 보다 실질적인 효과를 내려면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지 구체화하려는 시도는 최초의 부동산종합대책이라 할 1978년 8·8조치에서 이뤄졌다.

중동특수에 따른 오일달러가 유입되면서 그 여유자금이 부동산에 몰리면서 이때 처음 아파트가 고급주택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76년 12월 1가구1주택 가운데 고급주택을 과세대상으로 전환하는 데 이어 1978년 봄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마다 부동산값이 오르는 현상을 보이자 정부는 8·8조치에 앞서 ‘부동산투기지역 고시제도’를 발표했다.

고시된 투기지역의 토지나 건물에 대한 양도세를 내무부가 고시하는 ‘과세시가표준액’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국세청이 별도로 고시하는 ‘기준시가’를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과표를 높여 세금 부담을 늘리겠다는 뜻이다.

양도세의 획기적 전환점이 될 뻔했던 8·8조치

주목해야할 건 8·8조치의 원안에 담겼던 획기적 구상이다. 거래당사자와 거래금액이 기재된 부동산거래용 인감증명제도를 실시하기로 하는 동시에 양도세를 회피하기 위해 극성을 부리던 미등기전매를 막는 수단으로 인감증명의 유효기간을 1주일로 대폭 줄이는 안이 들어있었다. 실거래가를 과표로 삼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동시에 등기 전에 수차례 사고팔면서도 세금 없이 매매차익을 올리는 투기 관행을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당시 이 안을 마련했던 강만수 전 재정경제부 차관은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다른 나라에 유례가 없는 양도소득에 대한 물가상승률 공제는 가격상승에 따른 소득을 공제하여 투기소득 과세의 실효성이 반감됐다. 특히 양도가격을 거래가격이 아니라 정부가 정한 시가표준액을 기초로 과세할 때는 과세를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숭숭 뚫린 면세 허점을 막는 동시에 실제 거래되는 가격을 근거로 한 과세가 없이는 양도세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당초 안은 변질되고 만다. 강 전 차관은 부처간 의견조율의 어려움을 기록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건설부가 소극적이었고 내무부의 반대가 강했다. 투기꾼들과의 전쟁보다 내부 반대자들과의 전쟁이 더 힘들었다. 밤낮 없는 수고가 허탈할 뿐이었다."

강 전 차관은 "(2005년 8·31 조치로 전격 도입된)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 제도는 그때 거래 내역을 기재하는 인감증명제도만 실행했어도 불필요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양도세 강화 외에는 ‘원안 변질’

결국 인감증명제도는 ‘부동산 거래용’으로만 표시하고 유효기간을 1개월로 하는 것으로 수정됐고, 그밖에 토지거래 허가제는 신고제로, 변호사 등에 의한 토지 매매계약 체결제도는 공인중개사제도로 변질됐다. 그나마 원안이 지켜진 건 양도세 강화뿐이었다. 물가상승률 공제를 폐지하고, 1가구1주택의 면세요건을 6개월 이상 실제 거주로 요건을 강화하는 것으로 발표됐다.

부동산 경기가 활황이면 조이고, 불황이면 풀어주는 양도세의 운명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건 8·8조치를 전후로 한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그리고 IMF 외환위기 이후의 두 시기다. 8·8조치 이후 2년간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일반경기까지 불황의 여파가 미치자 완화가 시작된다.

양도소득세 세율 인하를 1면 톱 기사로 보도한 1980년 9월17일자 조선일보


다시 부동산 경기가 달아오르자 ‘뒤집기’

1980년 9월 경제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면서 양도소득세를 최대 20% 인하하고, 물가상승률까지 양도가격에서 공제하는 양도소득특별공제제도를 부활시켰다. 미등기전매의 양도세율도 80%에서 75%로 낮췄다. 석 달 뒤인 12월에는 탄력세율을 적용해 이미 낮춘 양도세를 절반까지 추가로 감면해주는 조처를 취했다. 이 탄력세율은 애초 1981년 9월까지 적용하기로 했으나 잇따른 경기부양책으로 1984년 3월까지 연장됐다.

그러나 1982년 하반기부터 부동산경기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또다시 뒤집기가 시작된다. 1983년 2월 ‘2·16 부동산투기억제대책’으로 부동산투기지역고시제를 다시 시작했고, 4월에는 ‘4·18 토지 및 주택문제종합대책’을 발표해 양도소득탄력세율의 적용시한을 1984년3월에서 1983년 6월로 앞당기고, 1세대1주택의 비과세 요건을 거주기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렸다.

8·8조치 때도 자리 잡지 못한 실거래가 과세는 사실 1975년부터의 원칙이었다. 예외적으로 실거래가액이 불분명할 경우에 보충적으로 기준시가로 양도소득을 산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양도소득 과세 중 실거래가에 의한 과세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 기준시가에 의한 과세였다. 국세청의 ‘고백’을 들어보자.

"과거 75년부터 82년까지 실거래가로 양도세를 과세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정된 조사인력으로 모든 거래에 대해 실거래가로 신고했는지 여부를 조사하기가 불가능한데다, 조사받지 않은 경우와 조사받은 경우의 과세 불공평 문제가 발생했다. 아울러 납세자가 실가를 입증할 자료를 분실한 경우도 발생하는 등 조사자와의 마찰도 없지 않았다.

제도적인 뒷받침 없이 불충분한 국세청 조사인력만으로는 양도소득세를 실가로 과세하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따라 83년부터 부동산을 취득한 후 1년 이내에 양도하는 단기양도, 미등기 전매 등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시세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기준시가 과세제도로 변경하게 됐다."<세금에 대한 오해 그리고 진실>(국세청 펴냄)

하지만 기준시가제도는 내무부의 지방세 과세시가와 국세청의 특정지역 기준시가 등으로 지가체계가 일원화하지 못한데다가 내무부의 과세시가표준액이 실거래가액보다 지나치게 낮게 책정돼 실효를 갖기 어려웠다. 게다가 파는 사람은 양도세를 줄이기 위해, 사는 사람은 등록세와 취득세를 낮추기 위해 공공연히 행해지던 이중계약서 관행을 막을 방법은 더더욱 없었다.

물론 개선 노력은 있었다. 1989년 4월 지가의 현실화 및 지가체계의 일원화를 위한 ‘공시지가’ 제도가 도입됐다. 그동안의 기준시가를 대신한다고는 해도 토지는 개별공시지가로, 건물은 내무부 지방과세시가 표준액 건물분으로, 아파트·연립주택 중 국세청장이 지정한 지역은 국세청 기준시가로 각각 결정됐다. 그러나 여전히 이원화된 과세표준의 산출방식은 과세 형평에 어긋나며 실질과세 원칙과도 동떨어졌다.

양도세의 완성, 실거래가 과세로 가는 머나먼 여정

실거래가 과세는 오랜 정책 과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국토연구원 채미옥 박사가 1996년과 1998년에 실거래가 등기제를 통해 공시지가를 산정해야한다는 보고서를 잇따라 내면서 논의는 보다 깊어졌다. 1996년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재정경제원은 "양도소득세를 실지거래가액 기준으로 전환하기 위한 거래가격등록제의 도입방안 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조건이 붙는다. "실가기준으로 양도세 과세를 전환하기 위해서는 장기간 거래가격기재 의무화(부동산등기법 개정사항)가 진행된 후에나 가능하다."

등기부등본에 실거래가의 기재를 의무화하는 방안은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 시절에 잠시 등장한다. 1998년1월 인수위는 부동산 양도소득세의 경우 명목세율은 높으나 실효세율이 낮은 점을 감안해 최고세율은 낮추되 과세표준을 실거래가로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등기부등본에 실거래가의 기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이 논의는 곧 자취를 감췄다.

대신 IMF 외환위기가 몰아치면서 경기부양을 위한 부동산 정책이 우선 과제로 떠올랐고, 양도세는 또 다시 단골메뉴가 됐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4월 정부는 기준시가를 대폭 상향 조정했다. "서울 목동과 일부 지역, 수도권 신도시 등을 중심으로 부동산값이 상승세를 보인 것으로 파악됐다"는 것이다.

외환위기 앞에서 정책도 ‘촛불신세’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1998년5월 양도세 감면 대상을 전용면적 25.7평 이하 신축주택으로 대폭 확대하고, 두 달 뒤 전용면적 50평을 넘지 않는 모든 신축주택으로 확대했다. 또 9월에는 30~50%이던 양도소득세율을 10% 낮추는 세제개편안을 확정했다. 연말에는 1가구1주택자의 양도세 비과세 요건을 3년 이상 보유에서 1년 이상 보유로 완화키로 했다.

반전은 2002년 벽두부터 시작됐다. 강남을 중심으로 집값이 급등하자 정부는 국세청을 내세워 허위 계약서를 작성해 양도세를 제대로 내지 않은 투기혐의자를 대상으로 세무조사를 벌이는 한편 기준시가를 수시 조정키로 하는 등의 대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양도세에 대한 완급 조절이 주택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나 한 것일까. 학계의 오랜 논의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고 일부에선 부정적 연구 결과를 내놓고 있다. <부동산 양도세에 관한 연구>(윤덕병, 박기태 지음. 2004)는 주택매매가격지수와 아파트매매가격지수 등의 통계수치를 이용한 연구 결과, 외환위기 이후 주택경기활성화를 위해 작동한 양도세 완화정책은 실효성이 없었던 것으로 결론내고 있다.

또 수도권 일부 지역 및 고가주택에 대한 양도세 강화조치가 해당 지역과 고가주택의 주택가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2000년1월부터 2002년12월까지의 자료를 사용한 <양도소득세가 주택가격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최종훈 지음. 2003)는 양도세 강화가 주택 가격을 안정시키는 효과는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수요관리 정책의 일환으로 양도세를 활용하려면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했다. 2005년 8·31 정책으로 전격 도입된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 제도는 그 오랜 숙제의 결과였다.

"실거래가 과세만이라도 꼭 실시"

노무현 대통령의 인수위 시절부터 부동산 정책에 관여해 8·31 정책안 마련까지 줄곧 참여해온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의 증언이다. "대통령직 인수위 때 개혁과제 중 하나로 부동산 세제의 정상화가 있었다. 신고가격과 실제 가격이 다 틀리는 전근대적 수준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때는 실거래가에 의한 양도세 과세까지는 생각도 못했다. 지인이던 윤주현 박사(전 국토연구원 토지주택연구실 선임연구위원)가 청와대에 들어가면 한 가지만 꼭 하라고 했던 게 실거래가 과세였지만 말이다."

8·31정책으로 2006년에는 우선 1세대2주택자, 비사업용 나대지, 부재지주 소유의 농지 등에 대해서, 2007년부터는 모든 부동산으로 확대해 실제 벌어들인 양도차익을 기준으로 양도소득세를 과세하게 됐다. 국세청이 2006년 9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평형별, 보유연수별 2006년 상반기 실제 양도세 부담사례’를 보면, 1주택자와 2주택자간 양도세 부담이 같은 아파트라도 10배 안팎의 차이를 보였다. 예컨대, 서울 압구정동 미성 32평형의 양도세는 1400만원이지만, 2주택자라면 약 8배인 1억800만원이 됐다.

양도세 인하 압력이 거세졌고, 급기야 실거래가 기준 양도세 부과 문제가 헌법재판소까지 갔다. 강남지역 땅을 팔았다가 실거래가로 과세된 양도소득세를 납부해야했던 조 모씨 등 9명이 위헌 여부를 묻는 헌법소원을 냈고, 2006년 12월1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전원일치로 합헌결정을 내렸다. 마침내, 양도소득세의 실거래가 과세라는 오랜 숙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1가구1주택 비과세 폐지론과 고가주택

그런데 2003년 당시 김진표 부총리는 왜 비판의 집중포화를 감수하면서까지 1가구1주택 비과세 폐지론을 들고 나왔을까. 사실 학계에선 오래전부터 1가구1주택 비과세 제도의 폐지를 주장해왔다 (<조세론>(이필유, 유경문 지음, 2003), <부동산 처분과세제도에 관한 연구>(박한범 지음, 1994) 등). 서민 주거생활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비과세하고 있으나 이를 악용해 양도차익을 노린 부동산 투기의 수법으로 활용될 뿐더러 소득 있는 곳에 과세한다는 조세 형평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미국이나 일본처럼 일정액의 양도차익을 소득공제해줌으로써 실질적으로 양도소득세를 면세해주는 방안을 제시해왔다. 김진표 부총리도 당시에 대안으로 외국의 소득공제 제도를 언급했다. 그렇지만 참여정부가 1가구1주택 비과세 폐지를 구체안까지 준비하지는 않았었다.

김수현 청와대 비서관은 "1가구 1주택에 대한 양도세 논란은 실제 세금을 걷는 세수가 목표가 아니라 투명화의 문제였다. 따라서 실익도 없이 80%가 넘는 국민들을 불안하게 하기보다 다른 방법으로 대처하고 이 부분은 건드리지 말자고 정리했다"고 밝혔다.

 

‘고가 주택’이라는 다른 문

‘다른 방법’의 문은 이미 열려있었다. 국민의정부 말기인 2002년 가을, 10·11조치로 도입된 ‘고가주택’ 개념이다. 실거래가액 6억원이 넘는 주택을 고가주택으로 분류해 1가구1주택이더라도 양도세 감면 혜택을 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면적기준(전용 45평 이상)과 금액기준(거래가액 6억원 이상) 등 2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고급주택’으로 분류해 양도세를 매겨온 방식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반발은 거셌다. 한국경제연구원은 "국민의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위헌 소지마저 있다"고 주장했고, 당시 대통령 후보이던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정몽준 의원이 한목소리로 반대하고 나섰다. <동아일보>는 10월19일치 사설에서 ‘KDI(한국개발연구원)도 비판하는 부동산정책’이라는 제목으로 정부안을 비판했다.

참여정부 양도세 정책의 핵심은 실거래가 과세와 1가구2주택 등 다주택자에 대한 중과세다.‘불패신화’가 만연한 우리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정책 일관성’이다.


당시 재경부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김용민 전 세제실장(현 조달청장)의 증언이다. "1997년에 재산세 과장을 6개월 했는데 1가구1주택에 관한 비과세는 문제가 있다는 게 세제실의 오랜 과제였다. 자본이득에 대해 과세하지 않는다는 건 1억원이든, 2억원이든 과세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2002년 재산소비세심의관으로 있을 때, 고급주택에 대해서는 1가구1주택이더라도 비과세 대상에서 제외시켰는데 가만 보니까 전용면적 45평 이상이면서 그리고 6억원 초과되는 주택이라는 두 가지 동시충족 조건에서 다 빠져나가고 있었다. 타워팰리스의 십억대 주택도 세금 한 푼 안내고 다 빠져나갔다. 이건 안 되겠다 싶어 면적기준을 없애려고 고급주택을 고가주택으로 바꾸겠다고 보고하니까 위에서 깜짝 놀라더라."

 

언론 반발 뚫고 국회를 설득

그래서 대통령령으로 바꾸려던 출발은 양도소득세법을 고치는 쪽으로 선회했고, 재경위 의원을 일일이 설득한 끝에 개정에 성공했다. 

참여정부는 2006년 1월부터 부동산 거래시에 물건 소재지 관할 지방자치단체에 실제거래가액을 신고하도록 하고, 6월1일부터는 신고된 실거래가액을 부동산 등기부에 기재하고 있다. 2007년 현재, 1세대1주택자가 3년 이상 보유한 후 집을 팔 때 실거래가액이 6억원을 넘어서면 양도소득세를 내야한다. 6억원을 초과하는 고가의 주택은 전체의 2~3% 정도이며 6억원 초과분에 해당하는 양도차익만을 과세하고 있다.

 

저항과 유혹의 해묵은 반복

부동산 정책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정부 부처간의 논란은 오랜 역사를 지닌다. 1978년 8·8조치 때도 그랬지만, 1989년 초 당시 경제기획원, 건설부, 재무부, 내무부 국장들이 모여 토지공개념 3법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경제기획원은 과세의 수준을 높이려는 반면, 실제 토지소유자나 기업들을 접하는 내무부와 상공부 등의 부처는 세제의 급격한 강화에 소극적이었다. 우선 과표에 있어서 기획원은 당시 실거래가격의 15%에 불과하던 과표를 대폭 인상하려고 했다. 나웅배 부총리가 내무부를 설득하여, 1988년부터 1993년까지 5년간 토지는 60%, 건물은 50%까지 과표를 높이는데 합의하였으나 기획원이 이 일정을 단축하려하자 조세저항을 이유로 내무부가 반발하여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대신 공시지가 제도를 도입했다."(<주택정책 반세기>, 임서환 지음)

정부 내에서도 1가구3주택 양도세 중과를 놓고 많은 고민과 논의가 있었다. 2004년 11월12일 재경부에서는 "1가구3주택 중과세를 내년에 시행하는 것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투기가 가라앉고 주택 거래가 끊기는 상황에서 (연기를) 검토하고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2005년1월1일부터 시행하기로 한 1가구 3주택 이상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세 방침을 연기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시장에서는 ‘10·29 대책’이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파트 분양권 전매를 지방에서 부분적으로 허용하기로 한데 이은 완화 움직임이었기 때문이다. 10·29 대책에서 정부는 9~36%로 돼 있는 양도세 기본세율을 3채 이상의 경우 60%로 대폭 올리고, 투기지역은 탄력세율 15%포인트를 가산해 세율을 75%까지 끌어올리기로 했었다.

급기야 이정우 청와대 정책기획위원장이 "1가구3주택에 대한 양도세 중과를 예정대로 강행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언론은 정부 내 논의과정을 ‘정면 충돌’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으로 보도했다. 당시 외국 순방 중이던 노무현 대통령이 이에 관한 보고를 받았고, ‘정부 내 갈등이 있는 것으로 비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양도세 중과는 예정대로 시행하는 쪽으로 일단락됐다.

■ 타워팰리스 양도세 면세의 앞뒤

외환위기 당시 양도세의 고삐를 하나씩 하나씩 풀어준 결과, 웃지 못 할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하반기 들어 아파트 가격이 급상승하면서 ‘최고가 아파트’로 꼽히게 된 타워팰리스가 '전용면적 50평' 이하의 경우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수 억원대의 매매 차익을 고스란히 챙길 수 있게 됐다.

외환위기 당시 정부는 가라앉은 건설경기를 활성화할 대책으로 특정 기간(1998년 5월22일~1999년 12월31일, 2000년 11월1일~2003년 6월30일)에 신축주택을 취득한 경우, 잔금지급일로부터 5년 안에 매각하면 기존 주택을 1채 보유하고 있어도 1가구 1주택 비과세 혜택을 주어 양도세를 면제해주는 정책을 폈다(양도세는 보유기간에 따라 일정금액을 공제한 양도차익의 9~36%를 세금으로 내야하는데, 1년 미만 보유의 경우 양도세율은 36%에 달한다).

이 조치로 도곡동 타워팰리스 1차(1499가구) 분양과 2차 미분양 960가구의 소진 시기가 때마침 이에 해당돼 수 백가구가 혜택을 입게 된 것이다. 타워팰리스 1차는 1999년 6월 평당 1100만~1200만원에 분양했으나 문제가 불거져 나온 2003년 10월 당시 시세는 2000만~2200만원선이었다. 평당 1000만원 가까운 시세 차익을 보이고 있었다. 2003년 11월 한국일보는 "57평형의 경우 바로 팔면 시세차익만 4억원이 넘는데 1억원 가량의 양도세를 내지 않아도 되고, 68평형의 경우도 1억5000만원가량의 양도세를 면제받게 됐다"고 보도했다. 부동산 가격 급등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게 된 이들이 양도세 면제라는 횡재까지 덤으로 얻게 된 것이다.

이 특례제도는 2007년 말 끝난다. 현재 1가구1주택 양도세 비과세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는 기존 주택을 3년 이상 보유해야 하고 서울 등에서는 기존 주택에 2년 이상 거주하는 조건도 만족시켜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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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에 거래되는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책이 절판돼서 살 수가 없어서 비싼 값에 중고거래하시고,
국회도서관에 몇 만 원씩 줘서 제본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원래 이 책 자체가 정부부처 사이트에 올라왔던 내용을 엮은 것뿐입니다.
좋은 자료이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①]"아니, 실거래가를 그대로 적으라고요?"

[실록 부동산정책40년 ⑥] 시장 투명화와 실거래가 신고

특별기획팀 2007.02.21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첫번째 주제로 <형평성과 투명성 제고 정책>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① 시장 투명화와 실거래가 신고
② 오락가락 양도세의 교훈
③ 보유세 제자리 찾기와 종합부동산세

 


"명의(이름)도 가짜, 가격도 가짜."

그동안 부동산은 엄청난 시세차익을 내고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금을 빼돌릴 수 있는 불투명한 거래의 대명사였다. 부동산시장에는 가명, 차명, 명의신탁, 이중계약서 같은 단어가 늘 따라다녔다. 신고가격과 실제가격이 따로 놀아 무엇이 진짜 가격인지 알 수 없고, 가격 부풀리기와 이중계약서가 관행처럼 돼왔다. 세간에는 ‘부동산 세금을 제대로 내면 바보’라는 말이 상식이 돼버릴 정도였고, 제도적 허점을 악용해 마음만 먹으면 투기로 얻은 불로소득을 숨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같은 ‘검은 거래’는 ‘부동산실명제’와 ‘실거래가 신고-등기부 기재’라는 부동산시장 질서를 바로 잡는 제도를 통해 하나 둘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부동산 시장의 거래를 투명하게 하고 부동산 투기소득의 숨은 거처를 원천적으로 없애려는 노력은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차일피일 미뤄오던 오랜 숙제를 뜯어고치게 만들었다.

아파트의 실거래 가격이 단지별 평수와 층별로 공개(아파트 실거래가 공개시스템:http://rt.moct.go.kr)되고, 부동산 소유· 거래· 납세에 대한 개인· 세대별 통계가 정확히 집계(행정자치부 부동산정보센터:http://rimc.mogaha.go.kr)돼 국민들이 이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를 통해 시장동향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은 물론 소유현황과 편중 정도, 수급 및 거래실태 파악이 가능하다. 투명한 시장구조는 이미 우리 실생활에서 피부에 와 닿고 있으며 거래 투명화를 통해 투기 이익을 환수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마련되고 세제 형평성도 높아졌다.

부동산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
부동산정보 알리미 사이트


1995년 1월6일. 문민정부 3년차에 접어들면서 새해 벽두 김영삼 대통령의 내외신 연두기자회견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다.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이미 지시했으며 곧 단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1993년 8월 전격적인 금융실명제에 화들짝 놀랐던 시장은 또 한번 요동쳤다.부동산 실명제의 탄생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1면 톱으로 보도한 1995년 1월7일자 신문

 


그해 1월27일 입법예고된 ‘부동산실권리자명의등기에 관한 법률’은 실소유자 명의 등기와 명의신탁 무효에 관한 2개의 핵심조문을 포함해 본문 15개조 부칙 5개조의 간단한 법이었다. 모든 명의신탁 약정과 이에 따른 부동산 물권변동은 무효이며,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없도록 했다. 실명등기 의무를 위반한 경우에는 부동산가액의 30%에 해당하는 과징금을 부과토록 했다. 1995년 3월 부동산실명제법이 국회를 통과하자 당시 한국일보는 "부동산실명제는 금융실명제와 더불어 ‘경제혁명’의 양축이다. 투기 뇌물 탈세 등 ‘검은 거래’가 돈이나 부동산을 통해 이뤄지고 있어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가 시행될 경우 이 같은 ‘검은 거래’가 구조적으로 차단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이미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1월 홍재형 부총리에게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경제기획원 이근경 국장이 비밀리에 상당한 준비를 해오고 있었다.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을 계기로 부동산실명제 논의는 재무부와 통합된 재정경제원으로 옮겨졌다. ‘금융실명제실시단’이 ‘금융부동산실명제실시단’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법원 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팀이 ‘부동산 실소유자 명의 등기제’의 법안 준비에 들어갔다.

 

부동산 실명제 왜?

부동산실명제의 골자는 ‘등기 따로, 실제 주인 따로’의 부동산차명거래인 명의신탁을 금지시키는 것이었다. 1912년 일제시대 때 도입된 명의신탁은 그동안 가장 대표적인 부동산 투기 수법으로 지목돼 왔으며 재산은닉 및 분산 수단, 기업의 부동산 취득수단 등으로 악용돼 부동산거래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부동산 등기제도를 부실화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정부가 처음으로 부동산실명제 실시를 검토한 것은 1989년 조순 부총리 때다.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인 한이헌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부동산투기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토지공개념의 일환으로 부동산실명제 시행을 검토했다.

그러나 법조계와 재계는 명의신탁 금지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자유계약 원칙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위헌론을 제기했다. 결국 정부는 부동산실명제 논의를 유야무야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부동산등기특별조치법을 제정(1990년), 조세포탈과 부동산투기 등을 목적으로 한 명의신탁을 금지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이 법률에는 정상적인 사유가 있을 때는 예외로 한다는 단서를 두고 있어 약간의 법률무장만 한 투기꾼이라면 얼마든지 명의신탁에 의한 부동산투기를 할 수 있었다.

1993년 8월 이미 금융거래 실명제가 도입됐고, 1996년 1월부터 금융자산소득 종합과세제도까지 실시될 경우 비실명금융자금이 가명 및 차명으로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갈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부동산 부문에서도 실명제를 도입해 금융거래 실명제를 보완할 필요도 제기됐다.

부동산실명제에 의해 모든 부동산등기는 실권리자 이름으로 등기하게 됐으며 명의 신탁은 금지됐다. 종전의 명의신탁은 1년의 유예기간을 줬다. 부동산등기 실명제는 당시 부동산거래 시장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기반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지금은 대부분 부동산 거래자에게는 이 제도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당연한 것이 됐지만, 투기 및 불법증여 탈세나 세금회피 등의 목적으로 명의 신탁을 악용한 과거의 관행을 단절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

부동산 실명제 빠르게 정착

부동산실명제 실시 후 2년여 지난 1997년 5월 재정경제원이 발간한 ‘부동산실명제 백서’에 따르면 2년 동안 부동산을 실소유주 명의로 전환한 건수는 6만5976건으로, 총면적은 1억3072만평에 달했다. 건당 평균면적이 1981평에 이르는 셈이다. 또 부동산실명제를 위반한 사람들에게 부과된 과징금도 31건에 10억원을 넘었다.

특히 법인의 부동산 실명전환 건수는 1684건으로, 개인명의로 돼있던 부동산을 법인 앞으로 돌린 건수는 1461건에 달했다. 그동안 기업이 부동산매입에 임직원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당시 한 대기업이 실명제를 위반하고 다른 사람 명의로 대규모 땅을 숨겨뒀다가 적발돼 여론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신문들은 부동산실명제 추진 초기 "부동산 시장은 아주 냉각되거나 가격이 폭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명의 신탁된 부동산의 실제 소유자들은 경과조치기간에 자진 신고하여 실명으로 전환하든지 아니면 남의 명의로 된 부동산을 매각하여 현금으로 챙기지 않으면 안 될 처지다. 매물홍수가 예상된다"고 전망했다.(한국일보 1995년 1월7일자)

과연 그랬을까. 1995년 하반기 부동산실명제등 투기억제정책이 힘을 발휘하면서 부동산시장은 안정세를 보였다. 땅값 상승률은 0.6%에 그쳤고 집값은 전년보다 0.2% 떨어졌다.

하지만 1996년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연초 터진 우성건설의 부도 등 건설업체들이 겪고 있는 심각한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한 정부의 금융지원책과 함께 각종 규제 완화책이 쏟아지면서 그 해 주택가격은 다시 1.5% 상승 반전한 것이다. 정부는 1년간의 유예기간이 끝나고 명의신탁 매물이 본격적으로 나와 부동산 가격 상승을 막을 것으로 내다봤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결국 부동산실명제는 매물확대를 통한 가격안정이라는 직접적 효과보다는 부동산 거래 시장을 한 단계 투명하게 했다는 성과로 만족해야 했다.

실거래 가격 신고-등기부 기재 제도의 등장

"아니 세상에 실거래가격을 그대로 적으라고요?"

2006년 6월 말 서울 강남의 한 부동산중개소에서는 입씨름이 한창이었다. 아파트 매도자는 세금을 한 푼이라도 덜 내려고 구청에 신고할 계약서에 실제 거래가격에서 2000만원을 뺀 가격을 쓰자고 한다.

"다운계약서 좀 씁시다. 실거래가를 곧이곧대로 신고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다운계약서를 써주면 500만원 정도 더 깎아주겠다"고까지 제의한다. 하지만 아파트를 새로 산 사람은 나중에 자신이 그만큼 싸게 산 것으로 돼 매도할 때 그 만큼 ‘세금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계약서뿐만 아니라 아파트 등기부등본에까지 실거래가액이 기재된다는 부동산중개업자의 말에 결국 계약서는 실제 거래가격대로 적혔고 중개업자가 이를 인터넷을 통해 시·군·구에 신고하고 거래신고필증을 받아 등기소에 제출하는 것으로 계약은 성사됐다.

 

실거래가 신고'가 이제 부동산 시장의 '상식'으로 통한다고 평가한 매일경제 기사

 

부동산실명제가 ‘이름’ 부분의 시장 투명화 조치였다면 2006년 1월1일부터 시행된 부동산 실거래 가격 신고제와 6월1일부터 실시된 부동산 거래 가격 등기부 기재는 ‘가격’부분에서 부동산 시장을 투명하게 만든 또 다른 ‘사건’이었다.

"정부가 지난해부터 전국 모든 부동산에 대해 실거래가를 신고하도록 법을 바꾼 일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엄청난 사건이다. 유사 이래 우리나라에서 부동산에 관한 한 단일가격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고할 때 따로, 세금 낼 때 따로, 대출받을 때 따로 하는 식으로 그때그때마다 다른 가격을 쓰던 관행이 반만년 역사를 이어왔다."(매일경제 2007년 2월2일)

‘이젠 실거래價가 상식’이라는 제목으로 올해 한 경제신문에 실린 부동산 재테크 관련 기사 내용이다. "서울 강남에서 아파트 실거래가 신고는 이제 상식입니다"라고 시작하는 이 기사는 "실거래가 신고제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정착되면 우리나라 부동산의 패러다임을 혁신하기에 충분하다는 지적이 지나친 주장만은 아닐 성싶다"고 끝맺고 있다.

 

RTMS라는 '괴물 프로그램'

주택법에 이어 중개업법과 지적법 세법 등이 줄줄이 바뀌면서 실거래가를 신고하지 않는 것은 불법행위가 됐다. 건설교통부는 부동산거래관리 시스템(RTMS)라는 '괴물'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거래가를 검증하고 신고 위반 사례를 적발해내고 있다. 한국감정원이 공시가격과 거래 가격, 경·공매 가격, 국민은행 시세표 등을 종합 조사해 산출한 기준가격을 RTMS에 올리면 실거래가 신고 위반이 의심되는 거래는 자동적으로 ‘부적정’ 이름을 달고 튀어 올라온다.

다운계약서를 썼던 사람들 가운데는 일선 시군구와 국세청의 단속에 적발돼 덜 낸 취득세의 무려 24배나 되는 과태료를 물기도 했다. 중개업자는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다. 정부의 통합전산망은 부동산실명제와 실거래가 신고제 이후 개인은 물론 친·인척의 거래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 단골 숙원 사업"

사실 부동산 실거래가격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부동산 시장 시스템의 근본적 ‘허점’인 동시에 세제를 담당하는 재정경제부와 국세청, 행정자치부 건설교통부 등의 오랜 ‘숙제’였다. "투기 소득에 대해 세금을 제대로 매기고 싶어도 실제 거래가를 포착할 수 있어야 말이죠." 역대 정부에서 부동산 정책이 만들어질 때마다 이런 푸념이 따라다녔다.

빈부격차 해소를 위해 부동산 거래를 '투명하게'하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 신문 특집기사.


김용민 전 재경부 세제실장(현 조달청장)은 "실거래가 등기제도와 이를 토대로 한 공평과세는 1993년 이후 매년 재경부 세제실의 숙원사업이었다"고 회고했다. 학계에서도 공시지가의 적정성과 시가 근접도를 높이기 위해 실거래가 등기제와 실거래가 신고제 도입과 이를 기초로 한 공시지가 조사·산정 체계의 개선을 주장해 왔다.('공시지가제도의 선진화 방향에 관한 연구'-국토연구원 채미옥, 1999)
1996년 국정감사자료에 따르면 당시 재정경제원은 "실가기준으로 양도세 과세를 전환하기 위해 거래가격 등록제 도입방안 등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와 각종 제도적 장벽 때문에 유야무야 됐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의 인수위 보고서도 등기부 등본에 실거래가의 기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거래 투명·공평과세' 두 마리 토끼 잡기

"부동산 정책의 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답이 다 있다. 그런 데도 이러한 정책이 채택되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이해관계와 잘못된 관행 때문이다. 부동산 정책의 방향은 첫째, 모든 거래가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하고…."(2005년 6월20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다시 원점에서부터 근본대책을 마련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2개월여 동안 진행된 부동산 정책회의에서 실거래가 신고는 부동산시장 투명화를 위한 핵심정책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처음 논의 과정에서는 법원의 반대가 벽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산소유 관계를 나타내는 공식적인 집문서 땅문서인 등기부에 가격이 등재된다는 것은 국가기관인 법원이 그 가격을 보증해주는 셈이어서 법리적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격의 등기부 기재는 민법의 3대 원칙중 하나인 사적 자치의 원칙(계약자유의 원칙: 개인은 계약 등 법률관계를 자유의사에 기초하여 형성할 수 있다는 원칙)에 위배되는 문제점이 있는데다 무엇보다 집행상의 어려움도 컸다.

"실거래 가격을 등기부에 기재하는 것이 어렵다면 신고라도 하게 합시다."

이미 2003년 10.29 대책에서 실거래가 신고제를 추진했던 건교부는 실거래가 신고 시스템을 구축해 놓았다. 이제 이 시스템을 등기부 기재로 연결시키는 일만 남았다.

 

"법원을 설득하라"

법원을 설득하는 것은 재경부가 맡았다. 처음에 난감해하던 대법원도 부동산 투기 근절이라는 사회적 요구와 메가톤급 무게가 실린 8.31 정책의 핵심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당시 김용민 재경부 세제실장은 "부동산 문제가 워낙 심각해져서 그랬던지 완강했던 법원의 입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의외로 호의적이었다"고 회고했다.

결국 실거래가 신고나 등기부 기재 둘 중 하나만 돼도 성공이라던 투명화 과제는 이렇게 실거래가 신고와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 둘 다 달성됐다. 법원의 유권해석을 받아 8·31대책에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제도를 집어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거래가로 등기하면 지방세인 취득세와 등록세가 지나치게 높아진다는 문제가 생겼다. 서민들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행자부의 지적도 타당했다. 취·등록세 과표를 조정했다.

 

 

언론이 주목하지 않았던 핵심정책

투기꾼들에게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는 그동안 쌓아온 불로소득과 세금탈루의 피라미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한 ‘가짜와 은닉의 종말’ 이다.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는 8·31정책을 형성하는 핵심 축 가운데 하나였지만 당시 언론은 ‘투기억제’ 부문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이 두 가지 투명성 제고 조치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때로는 거래 위축이라는 핑계로, 때로는 전산시스템 미비로 수십 년 동안 미뤄져 오던 우리 부동산시장의 또 하나의 ‘구조적 맹점’이 마침내 해소되고 부동산 실거래가 파악체계가 정착됐다. 물론 일부 의도적으로 허위신고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 감정상 등기부는 내 재산의 모든 것을 나타내는 ‘집문서’다. 그렇게 만만한 문서가 아니다.

언론의 외면과는 달리 두 제도의 효과는 상당했다. 수십 년 동안 ‘거짓 신고 가격’에 둘러싸여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던 부동산 거래 내용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일반 국민들도 실거래가격이 기재된 부동산등기부를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게 되고, 매달 아파트 단지별 실거래 가격을 취합한 데이터베이스(DB)와 가격 조회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아파트 부녀회를 중심으로 한 호가 높이기는 구조적으로 어렵게 됐다.

2006년 1차 공개 때 500호 이상 아파트 단지 중 10건 이상 거래된 단지를 대상으로 한 것도 같은 해 하반기 2차 공개에서는 전체 아파트단지로 확대됐고 아파트별 면적과 가격형성에 영향이 큰 층별 정보도 추가됐다. 37만 1000건의 아파트 실거래 자료가 적정성 검증을 거쳐 투명하게 공개됐다.

이를 통해 재산세와 종부세 등 보유세의 세부담 형평성이 높아지는 효과도 생겼다. 그동안 공시가격은 시세(적정 시가의 80%)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공시가격 조사시점이 매년 1월 1일 기준이어서 1월 이후부터 이뤄지는 아파트값 등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짜와 은닉에 마침표"

그러나 앞으로 실거래가 자료가 축적되면 공시가격이 실거래가를 기초로 산정되기 때문에 공시가격은 시가의 적정수준으로 정해진다. 공시가격이 시세를 적정수준에서 반영할 경우 이를 기준으로 과세하는 종부세와 재산세의 세부담 형평성이 높아진다.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은 "실거래가 신고제는 금융실명제에 버금갈 정도로 부동산 시장에서는 획기적 조치다. 정부는 투기가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제도를 정비했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김수현 사회정책비서관은 "투명하게 거래, 보유, 과세현황을 파악하고, 이들 통계를 국민들과 공유하게 되면 부동산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변할 것으로 믿는다. ‘신고가격 따로, 실제가격 따로’ 식의 후진적 관성도 바뀔 것이다. 이는 앞으로 체계적이고 투명한 정책형성 과정에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거래가격이 등기부에 기재됨에 따라 부동산 관련 세금의 실거래가 과세제도의 기반도 구축됐다. 2007년부터 부동산 양도세를 실거래가 기준으로 부과할 수 있게 된 것도 2006년부터 시행된 등기부 기재제도 덕분이다. 투기꾼들에게 실거래가 신고와 등기부 기재는 그동안 쌓아온 불로소득과 세금탈루의 피라미드를 더 이상 지속할 수 없게 한 ‘가짜와 은닉의 종말’ 이다.

■ 부동산 가격체계의 정비

과거 부동산에 매기는 세금을 보면

국세인 양도소득세, 상속세, 증여세 등은 국세청에서 담당 공무원에 의해 결정되는 ‘기준시가’에 따라 부과되고,

지방세인 취득세 등록세 재산세 등은 시장 군수 구청장이 매년 결정 고시하는 ‘과세시가표준액’에 의해 부과됐다.

이 때문에 같은 지역의 같은 지번을 가진 토지의 가격이 담당 부처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고 과세시가표준액에 따라 부과되는 세금 역시 실질거래가격의 10~15%에 불과했다. 이 같은 불합리한 가격체계와 토지평가자격제도를 일원화해 1989년 4월 '지가공시 및 토지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공시지가제도가 도입되었고, 1990년 1월1일부터 공시지가가 공시됐다.

1990년 8월10일에는 ‘검인계약서제도’를 도입했다. 검인계약서가 도입되기 전에는 부동산을 등기할 때 ‘매도증서’에 나오는 가격대로 기재되고 이를 악용해 중간생략 등기가 가능해 중간거래자들이 양도소득세와 취, 등록세 탈세가 보편화했다. 이 때문에 검인계약서는 1978년 8.8조치 때 이미 도입을 약속했지만 시행이 10년 넘게 미뤄지다 1990년 8월에야 시행된 것이다.

하지만 검인계약서 역시 ‘종이호랑이’였다. 검인 담당 공무원이 계약서상 매매 대금의 실질심사권이 없음을 알고 당사자간 담합에 의해 실거래 가격보다 턱없이 낮은 가격으로 검인 받을 계약서를 이중으로 작성해 검인을 받았다. 1999년에 발표된 동의대 행정학과의 한 논문은 "부동산 거래로 인한 탈세를 막아 부동산 투기를 억제하고 실질적인 거래금액을 노출시켜 정당한 과세를 하기 위해 도입한 검인계약서제도는 취득세와 등록세의 과세표준액으로 활용되고 있으나 그 본질적인 의도는 적어지고 오히려 합법적인 탈세가 가능한 제도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1989년 4월1일 '지가공시 및 토지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토지로 인한 모든 과세에 공시지가가 과세표준으로 적용되었고 1990년 7월1일부터 양도소득세와 상속세 및 증여세에도 공시지가가 과세표준으로 적용됐다. 전국의 땅 가운데 대표성이 있는 땅인 표준지에 대해 건교부가 공시지가를 책정하면(표준지공시지가) 각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기준으로 개별 땅에 대한 공시지가(개별공시지가)를 산정한다. 이처럼 지가는 공시지가로 통일됐으나 건물 가격은 건물분 과세시가표준액으로 산정돼 실제 시장가격과 크게 차이가 났다. 이 때문에 2005년부터 공시주택가격제도(토지 가격+건물 가격)를 도입해 건물가격의 시가 근접도를 높였다.

이같이 얽히고설킨 부동산 가격체계가

8.31정책 이후 종부세와 재산세 등과 같은 보유세는 공시가격으로,

양도세와 취 등록세는 실거래가로 통일 된 것이다.

 

보유세 과표가 그동안 면적 기준에서 가격기준으로 바뀌면서 2006년1월부터 아파트 등 공동주택은 물론 단독주택까지 공시가격제도가 전체 부동산으로 확대됐다. 그동안 국세청이 발표해오던 아파트 기준시가도 건교부가 공시가격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용어풀이

 주택 공시가격=아파트,연립주택,다세대 등 공동주택 공시가격과 단독주택 공시가격으로 나뉜다. 공시가격은 재산세,종합부동산세 등의 부과 기준이 된다. 과거 공동주택 공시가격은 국세청이 기준시가란 이름으로 발표하고 단독주택 공시가격은 건설교통부가 발표했지만, 2006년부터 건교부가 모든 주택의 공시가격을 일괄 발표한다. 공동주택 가격은 가격변동이 심해 모든 주택을 조사해 산정한다. 반면 단독주택 가격은 건교부가 표준주택을 선택해 비준표를 작성해 주면 시·군·구에서 이를 토대로 개별 주택의 토지와 건물을 평가해 공시한다.

 과세 표준=세금을 부과할 때 기준이 되는 가격,수량 등을 말한다. 소득세는 소득액 등이 과세표준이 되지만 재산세 등을 부과할 땐 공시가격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공시가격의 일정률을 반영한 금액을 과세표준으로 한다. 2006년 재산세의 과세표준은 주택 공시가격의 50%, 종합부동산세는 70%이며 매년 단계적으로 현실화될 예정이다.

 공시지가=땅값은 건교부가 공시지가란 이름으로 발표한다. 전국의 땅 가운데 대표성이 있는 땅인 표준지에 대해 건교부가 공시지가를 책정(표준지 공시지가)하면 각 지방자치단체가 이를 기준으로 개별 땅에 대한 공시지가(개별공시지가)를 산정한다. 표준지 공시지가는 매년 1월1일, 개별지 공시지가는 5월 31일 공시되며 토지 관련 세금, 토지수용보상가 산정 등의 기준으로 활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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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에 거래되는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책이 절판돼서 살 수가 없어서 비싼 값에 중고거래하시고,
국회도서관에 몇 만 원씩 줘서 제본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원래 이 책 자체가 정부부처 사이트에 올라왔던 내용을 엮은 것뿐입니다.
좋은 자료이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왜올랐나'④공공기관-언론-불신의 메카니즘]"부동산 투기 누가 부추기나

제1부 ‘왜 올랐나’ ④ 공공기관-언론-불신의 메카니즘

[실록 부동산정책40년 ⑤]

특별기획팀 2007.02.16

4-부동산 심리와 정책불신

‘부동산은 심리다.
'왜곡된 정보로 ‘집값이 계속 오른다’고 부추기면 시장이 동요하게 된다.
이 같은 불안은 결국 가수요와 투기심리를 낳는다.

2006년 하반기의 ‘조바심 수요’에 의한 집값 급등 현상은 부동산 시장의 심리적 요인을 잘 보여준다.

 

2006년 쌍춘년 고분양가 ‘조바심 파동’

그 해 늦여름, 쌍춘년을 맞아 크게 늘어난 신혼부부 수요와 이사철이 겹치면서 전세물량 부족 현상으로 전셋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에 정부가 8월 판교 2차 분양에서 중대형 아파트 분양가를 평당 1800만원대로 책정한데 이어 9월 서울시는 은평뉴타운 분양가를 주변 시세의 2배에 가까운 최고 1500만원대로 정하면서 고분양가는 주변 아파트 가격 상승으로 이어졌다.

공공분양 아파트 값이 크게 오르자 파주 운정 신도시에서는 한 건설업체가 분양가를 인근 아파트 매매가의 2배에 이르는 평당 1460만원으로 책정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이 업체는 분양가를 평당 평균 1297만원으로 내렸으나, 오히려 고분양가 폭리 주장이 근거 있음을 반증한 셈이었다.

당시 건설교통부는 이례적으로 "내년에 파주지역에서 나오는 중대형은 원가연동제와 채권입찰제가 적용돼 저렴하게 나오니 해당 아파트 청약을 자제하라"고 당부했지만 문제의 아파트 청약은 4대 1이 넘는 경쟁률로 전 평형이 1순위 마감됐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과 가격 상승 기대감이 그대로 드러난 사례였다.

2006년 9월 고분양가 논란 속에 문을 연 파주 운정 신도시의 한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찾은 청약인파

 

고분양가로 인한 집값 상승의 여파로 그동안 관망하던 실수요자들이 불안감 속에 추격매수에 나서자 오름세는 수도권 전역과 중소형 평형으로까지 확산됐다. 언론은 자고 나면 수천만~수억원씩 호가가 뛰는 아파트 값을 스포츠경기 중계하듯 보도했다.

 

공공기관마저 노골적 ‘땅장사’

이처럼 주택에 대한 ‘조바심 수요’를 유발한 고분양가는 주택이 들어서는 땅의 가격, 즉 택지비가 비싼 것이 큰 요인이다. 민간 택지뿐만 아니라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급한 공공택지로 지은 아파트에서조차 고분양가 논란이 매번 되풀이되면서 주택시장이 철저히 시장 메커니즘으로만 움직인다는 인식은 투기심리를 부추긴다. 토지공사·주택공사와 지자체의 공영개발기관조차도 시장원리에 입각해 택지매각 비용을 받겠다며 노골적으로 땅장사를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고, 이는 곧 저돌적인 투기심리의 배경이 됐다.

2005년 초 서울시는 뚝섬에 초고층 주상복합단지를 조성하겠다며 1,3,4 구역 상업용지를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가격인 1조원이 넘는 돈을 받고 팔았다. 당시 최고가 경쟁입찰 방식을 도입한 서울시는 당초 참여업체들의 경쟁이 과열됐다며 돌연 매각을 취소했다가 4개월 뒤인 2005년 6월 감정가를 40%나 올린 채 다시 공매에 나서면서 논란을 빚었다.

특히 당시 4구역의 땅을 평당 7732만원이라는 사상 최고가에 낙찰받은 한 업체는 최근 두 차례나 연장한 잔금납부기한을 넘기면서 사업 자체의 위기를 맞고 있을 정도다. 땅값이 7000만원대면 아파트 평당 분양가가 4000만원을 넘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와 일각에서는 "뚝섬 땅을 비싸게 팔아 서울시 빚을 줄인 유능한 서울시장인지는 몰라도 국가 전체로는 아파트 값 폭등을 부채질한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이밖에도 토지 보상비용의 급격한 증가와 도로, 전력 등 수조원 규모의 간선시설 비용이 고스란히 분양가에 전가되는 현상, 저밀도 친환경 개발을 표방해 용적률을 낮추는 방향의 개발도 아파트 가격상승의 주요 원인이 됐다.

이에 따라 과거에는 아파트 분양가에서 20~30%에 불과하던 택지비 비중이 지금은 대부분 절반을 웃돌고 있다. 논란을 빚은 은평뉴타운의 택지비 비중은 분양가의 57.2%였으며 역시 고분양가 논란을 일으킨 판교신도시 44평형은 평당 분양가(1857만원) 대비 토지비용이 70.2%(대지비 41.6%, 채권손실액 28.6%)에 달했다. 이는 공공재의 성격이 강한 주택조차 철저히 시장 메커니즘에 따라 움직인다는 인식을 심어 투기심리를 부추기고 실수요자들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과도한 택지비 부담이 아파트 분양가를 밀어 올리는 구조적 문제가 계속 제기되자 정부는 2006년 7월부터 택지 공급가격 기준을 기존의 감정가에서 토지조성원가의 90~110%로 바꿨다.

투기에 취약한 부동산 시장

부동산은 단기적으로 가격 왜곡이 일어나기 쉬워 투기에 취약한 상품의 특성을 갖고 있다. 특히 아파트는 다른 재화에 비해 살 사람이 상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사전에 알기 어렵다. 우리나라 아파트 시장처럼 선분양제가 일반화 돼 있고 특정 지역에 수요가 몰리는 경우에는 수요자와 공급자 간의 정보 비대칭성이 더욱 심해져 수요자들은 구조적으로 고분양가 등 공급자 우위의 시장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여기에 부동산 정보업체들이 인터넷에 제공하는 매물과 시세 정보는 높은 가격을 원하는 매도자 호가 위주의 시황을 부추겨 부동산 가격을 왜곡한다. 이러한 상황은 시장의 혼란과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불안한 가격 매커니즘 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시세 조작도 가능한 상황을 초래했다. 결국 여기서 피해의식이 깔린 투기 심리도 생겨났다.

부동산 가격은 호가라도 일단 높은 가격이 형성되면 값이 잘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왜곡된 정보들은 투기를 장기화한다. 우리나라처럼 수도권 집중화가 심하고 개발 가능한 택지 비율은 매우 낮아 부동산 가치의 희소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상황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진다. 2007년 1·11 대책을 기점으로 아파트 가격이 뚜렷하게 하향 안정세를 보이고 있으나 하락폭이 상승기 때만큼 크지 않은 것은 이러한 부동산 시장의 특성에 기인한다.

또 부동산은 수요가 증가해도 공급까지는 상당한 시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고 여기서 발생하는 가격의 비탄력성 탓에 단기적으로 가격왜곡 현상이 일어나기 쉽다. 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주택 크기나 질에 있어 기존의 주택보급률만으로는 측정하기 힘든 새로운 수요가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신규 수요를 공급이 즉각 뒷받침 할 수 없다는 점도 아파트 가격 상승의 한 요인이 됐다.

부동산은 이처럼 시장실패가 쉬운 공공재적 성격을 가진 상품이다. 결국 시장 실패로 인한 공급부족이나 가격왜곡 등 문제가 불거지면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이래도’ 못 믿고, ‘저래도’ 못 믿어

2000년 하반기부터 서울 강남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시작된 부동산 가격 상승 추세는 과거 부동산 가격 상승이 2~3년에 그쳤던 예와는 달리 장기간 지속되는 특징을 보였다. 여기에는 IMF 위환 위기 이후 지속된 저금리와 시중 유동자금 증가, 국지적 주택공급 부족, 재건축 기대심리, 금융권의 환경변화, 과도하게 풀린 부동산 규제 등 여러 가지 요인과 함께 수십년 간 경험한 ‘부동산불패’ 라는 투기심리도 한 몫을 했다.

고철 주택산업연구원장은 2006년 아파트 값 상승에 대해 "정부 정책을 믿지 못하고 불안심리가 커진데 따른 심리적 요인이 크다. 공급을 확대한다고 하면 재건축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해 집값이 뛰고, 규제를 늘린다고 하면 공급이 줄 것으로 보고 오르는 형국으로 한마디로 진퇴양난"(2006년11월3일 서울경제신문 인터뷰)이라며 부동산 정책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한 당국자도 당시 집값 폭등에 대해 "5·31 지방선거 패배, 야당 의원들이 부동산 문제에 대해 다른 시그널을 준 것, 북핵 사태 이후 금리정책을 진짜로 못 쓸 것이라는 시장의 확신 등 정부가 (심리적으로) 잡힐 수 있는 약점은 모두 잡힌 상태였다"고 토로했다.

이와 함께 대선으로 정책 기조가 변화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 특히 일부 언론은 대선에 편승한 경기부양책이나 각 후보들이 인기몰이용으로 쏟아놓을 개발공약, 정권이 바뀔 경우의 부동산 규제 완화나 정책후퇴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시장의 불안감과 국민들의 투기심리에 불을 지폈다.

수십 년 간 부동산 불패 학습효과

 

1975년 '투기부인'들의 서울 영동 잠실 여의도 일대의 아파트 투기열풍을 소개한 신문기사. 중앙일보 75년 3월25일자.

부동산불패의 믿음은 어제오늘 형성된 것이 아니다. 개발 초기 단계인 1960년대 말 말죽거리 신화 때만 해도 부동산 투기로 얻는 시세차익은 20-30배에 달했다. 1970년대에는 시세 차익이 5-6배, 1980년대에는 2-4배로 줄었으나 2003년 이후에도 상승기에는 여전히 2배 정도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었다.

30년전인 1977년4월 국세청 조사에서도 당시 분양경쟁률이 수십 대 일에 달했던 여의도 아파트 당첨자들 중 3분의 1이 무자격자 즉 투기꾼들이었음이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매일경제신문(1974년5월10일자)은 1969~70년 사이 경부고속도로 개통을 전후해 신갈인터체인지에서 용인에 이르는 지역의 땅값이 4년 만에 15배나 뛰었다고 보도했다. 같은 신문(1977년10월17일자)은 당시 지하철 2호선 착공 발표 후 일주일이 지나자 연초 평당 3만~7만원이었던 이 지역 땅값이 13만원을 호가하고 이후에도 계속 오르고 있어 땅주인들의 해약 요구로 거래질서에 혼란을 빚는다고 전했다. 개발 소식에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투기세력이 개입해 매물을 돌리며 가격 상승을 주도하는 오늘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 30년 넘게 되풀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재벌과 권력층 주도 부동산 투기

부동산이 전국민의 재테크 대상이 된 오늘날과는 달리 부동산 투기가 재벌과 개발 정보를 미리 입수한 일부 권력층 주변 자산가들의 전유물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서울신문 1983년6월10일자.

서울신문(1983년6월10일자)은 국립공원 지리산지구 관광집단시설지역 고시 예정지에 발표 1년 전부터 투기세력이 몰려 2년 전 평당 1000~2000원 하던 땅이 2만~5만원으로 2년 동안 20배 이상 급등했다고 보도했다. 해당 지역의 개인땅 85%를 서울, 전주 등 외지인이 매입해 개발정보가 누설됐음을 방증했다.

최근에 와서야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는 화성, 판교 지역도 1980년대부터 수도권 신도시 개발후보지로 지목돼 오면서 이미 1990년대에 ‘거물 외지인’들의 투자가 집중됐다. 특히 정치인 등 고위층은 19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이 지역 토지를 매입했다.

1993년 문민정부에서 시작된 공직자 재산공개 결과는 힘 있고 출세한 사람치고 부동산 부자 아닌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많은 행정부, 사법부 내 장·차관급 인사들과 국회의원, 군 장성들이 투기성 불법, 탈법 부동산 거래와 보유가 밝혀져 옷을 벗었다.

이후 2000년 제정된 인사청문회법에 따라 총리 등 고위공직자들이 국회에서 청문회를 거칠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항목이 부동산 투기 관련 의혹이었다. 국민들이 부동산 투기와 그 대응책에 냉소적이고 무감각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전국민 부동산 재테크 시대

그러나 외환 위기 이후에는 은행들이 주수익원이던 기업 대출 감소에 따라 주택담보 대출 비중을 크게 늘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대출을 통한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저금리와 손쉬운 주택담보대출로 자금원이 갖춰지자 수십 년 동안 투기꾼들의 승리를 지켜보면서 기회만 닿는다면 투기행렬에 기꺼이 동참하겠다는 의식을 내면화한 사람들은 집값 오름세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부 아파트 주민들은 부녀회 등을 통해 집값 담합에 나서 시장질서를 어지럽혔다. 건설교통부 집값담합신고센터에 적발된 서울 지역 한 아파트는 실거래가보다 최고 2억원이나 높은 호가로 담합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가 담합행위에 공정거래법을 적용한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밝힌 데다 실제 대응조치도 일정기간 실거래가를 공개하고 부동산정보제공업체에 시세정보 제공을 중단시키는데 그치고 있다. 심지어 일부 단지는 건교부, 재경부가 강력한 처벌 규정을 신설하겠다고 발표하자 규제 이전에 집값을 서둘러 올려놓겠다는 식의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부동산 투기해도 벌금 약간 내면 그만"

"조 모(33·여)씨는 아파트 10채, 상가 32채, 오피스텔 24채를 갖고 있으면서 불법으로 조합원 자격을 얻어 5채의 신규분양 아파트를 공급받아 구속됐으나, 재판에서 벌금 2500만원만을 선고받았다. 조 씨는 앞서 배임죄로 이미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임야 1만8000평을 8억2800만원에 사들여 405명에게 사기 분양해 317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된 배 모(37·남)씨 등 8명의 기획부동산 업자들은 초범이거나 동종 전과가 없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또는 벌금 200만원의 판결을 받았다."

정부의 ‘부동산투기사범 합동수사본부’가 2005년7월~12월까지 대대적으로 부동산투기범죄에 대한 특별단속을 벌인 후 구속된 252명에 대한 법원 판결 결과의 일부이다. 부동산 시장을 왜곡시키고 막대한 불법 이득을 취한 투기 사범들에게 내려진 이 같은 솜방망이 처벌은 국민들에게 ‘부동산 투기를 해도 벌금 얼마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그릇된 법 감정을 조장해 왔다.

또 부동산 투기 행위는 법망을 피해 날이 갈수록 수법이 다양하고 교묘해지고 있는데 반해 부동산중개업법 등 관련 법규는 범죄유형을 단순하게 규정하고 있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형량도 가벼운 편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주기적으로 부동산 투기가 활개 칠 때마다 관련 법규 정비, 공급 확대, 세제와 금융 정책 등으로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유도하는 한편 국세청 세무조사와 투기자 명단 발표 등 투기 가담자들을 직접 겨냥한 응급 대책들을 끊임없이 내놨으나 투기 현상이 거의 만성화 되다시피 하면서 투기세력과 국민들 모두 별다른 경각심을 가지지 못하게 됐다.

불투명한 부동산 거래 관행과 불합리한 세제도 국민들의 투기불감증에 일조했다. 실거래가를 숨기고 이중으로 다운계약서를 작성해 취·등록세, 양도소득세를 탈세하는 행위가 당연한 관행처럼 굳어졌다. 양도소득세도 실거래가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낮은 기준시가를 기준으로 부과돼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나마 경기등락에 따라 세율과 과표가 오르내리고, 감세 혜택이 잇따르면서 정책불신을 키워왔다. 과거 기존 주택의 재산세 역시 가격이 아니라 면적 등 불합리한 과표기준과 체계로 인해 오히려 투기수익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해왔다.

결국 국민들은 수십 년 간 미비한 정책과 부실한 법적용의 틈을 뚫은 부동산 투기의 높은 수익성을 지켜보면서 ‘부동산 투기는 비용 대비 효율이 높은 투자’라는 경험칙을 얻게 됐다.

"부동산은 재산증식 도구"라는 의식

그 결과 국민들도 주택이나 토지를 주거 수단이나 생산요소로만 여기지 않고 재산증식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됐다. 국토연구원이 1979년, 1985년, 2000년, 2006년 네 차례에 걸쳐 실시한 ‘토지에 대한 국민의식조사’ 결과는 이 같은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유자금이 있으면 무엇을 하겠느냐는 질문에 1979년에는 토지나 건물에 투자하겠다는 응답이 28.6%였으나 2006년 조사에서는 57.4%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부동산 중에서도 서울과 수도권, 특히 강남권에서는 주택 선호도가 높고 수도권 이외 지역에서는 토지 선호도가 높아 지역별 부동산 값 상승 추이가 그대로 반영됐다.

주목할 만한 변화는 1979년에는 여유자금을 개인사업에 쓰겠다는 답변이 39.9%에 이르렀으나 점차 줄어들다 2006년에는 7.6%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2006년 조사를 주도한 국토연구원 채미옥 박사는 이에 대해 "건전한 근로의식이 감소하고 부동산 투기를 내면화, 합리화하는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주택가격 과도하게 높지만 그래도 오른다?"

부동산투기에 대한 부정적 의견도 과거에 비해 감소했다. 재산증식을 위해 부동산을 사고파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응답이 2000년 69.5%, 2006년에는 67.5%로 1979년 51.1%에 비해 16%포인트 정도 증가했다.

국토연구원은 "토지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 수준이 낮고 토지시장 참여자들은 자본이득을 챙기려는 형태로 움직이고 있다. 토지시장과 사법부 판례, 국민의식 모두가 부동산의 사익옹호를 지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2007년 2월 삼성경제연구소의 '주택가격에 대한 가계의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조사대상 가구의 91.4%가 현재 주택가격이 과도하게 높거나(66.6%) 약간 높다(24.8%)고 답했다. 그러나 올해 주택가격 전망에 대해서는 하락할 것이라는 응답이 30.5%(조금 하락 28.2%, 크게 하락 2.3%)인 반면 현 수준을 유지하거나(34.1%), 상승할 것(조금 상승 30.4%, 크게 상승 5.0%)이라는 응답은 69.5%에 달해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과 집값 상승 기대가 만연해 있음을 보여줬다.

언론 "투기도 투자다" 궤변

 

이는 언론의 논조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과거에는 언론들이 대부분 부동산 투기를 ‘망국병’으로 치부하면서 ‘다음 세대에도 죄를 짓는 행위’로 규정했다.

1992년5월6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보자. ‘땅투기 억제는 절대 선이다’라는 단정적인 제목으로 1990년 이뤄진 재벌의 비업무용 부동산 강제매각 조치(5·8조치) 2주년을 맞아 당시의 강제 매각조치가 불가피했으며 결과적으로 부동산시세를 ‘가라앉게 한’ 효과가 있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신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권력에 의한 사유재산의 강제매각 조치가 불합리한 줄은 알지만 보편적인 자로 재기에는 한국의 국토는 너무 좁고 인구는 많으며 또 한국의 재벌 형성, 나아가 자본축적과정이 다른 선진국이나 경쟁국과는 다르다’고까지 설명하며 5·8조치를 옹호했다.

그러나 13년 뒤인 2005년4월29일자 동아일보 사설은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않고 기존의 부가가치를 나눈다는 점에서 부동산 투기 소득이나 주식투자 이익이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시장경제에서 투자와 투기를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이 사설은 또 ‘창조적 소득은 인정하되 투기적 소득은 일절 인정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집을 팔아 남긴 이득을 모두 세금으로 환수하는 정책을 동원하는 것은 시장을 이념이나 정치적 포퓰리즘의 실험장으로 삼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부동산 광고와 언론의 논조 연관성 있다"

사실 우리나라 언론은 논조나 정치적 지향과는 별도로 부동산문제에 관해서는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신문들은 IMF 외환위기 이후 대형 광고주가 줄어들고 케이블 방송과 인터넷 뉴스포털, 무가지 등 신규매체와의 경쟁이 치열해진 환경 속에서 수입의 대부분을 광고에 의존하고 있다. 이에 따라 신문들은 기업광고를 안정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서울 강남 거주자들을 비롯한 ‘구매력 있는 독자층’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부동산 투기붐에 따라 부동산 광고가 핵심적인 수입원이 되면서 신문들은 종합부동산세 등 정부의 투기억제 대책에 호의적이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동산 광고가 신문들의 놓칠 수 없는 수익 영역이라는 점은 투기세력의 실체를 분석한 책 ‘대한민국은 부동산공화국이다?’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은 2001~2004년까지 신문광고에서 건설 광고가 매출 기여도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 유력 신문사 광고국 직원은 "후분양제가 도입되면 건설업체가 자체 자금으로 70% 이상을 시공한 뒤에야 광고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광고물량이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어 신문사에서는 최대한 도입을 막고 싶은 제도"라고 말해 일부 신문들이 ‘시장원리’를 내세우며 후분양제를 적극 반대하는 속사정을 드러냈다.

서화숙 한국일보 편집위원도 2006년4월 열린 ‘정부의 부동산정책과 언론보도’라는 기자포럼에서 2006년3월 한 달치 4개 신문의 본면에 실린 광고를 분석한 결과 "정부 부동산 정책에 대한 비판적 논조와 부동산 광고 건수가 연관성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서 편집위원에 따르면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가장 비판적인 A신문의 부동산 관련 전면 광고는 105개으며 논조상 비판적인 순서대로 B, C, D 신문의 전면 부동산 광고는 각각 76개, 25개, 21개였다.

"서민 끌어들여 최대 피해자로 묘사"

특히 보수 언론과 일부 경제지들은 정부의 투기수요 억제책이 나오면 ‘대책이 앞으로도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관측이 강했다(조선일보 2005년9월1일)’ ‘충격효과가 사라지면 다시 오를 수 있다(조선일보 2005년9월2일)’ 등의 ‘희망사항’과 ‘주장’을 전문가 분석이라는 명목으로 쏟아냈다. 이들은 정부대책이 약효를 발휘해 집값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면 버블 붕괴나 서민 피해를 우려하는 논조로 입장을 선회했다. 서화숙 편집위원은 "언론이 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모호한 개념인 ‘서민’을 끌어들여 최대 피해자로 묘사한다"면서 "세금부담이 너무 크고, 시장에 맡겨 공급을 늘리라는 일부 언론의 주장은 1가구 다주택자와 건설업체의 입장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LG경제연구원의 김성식 연구위원도 "투기세력의 자기실현적 자가발전을 견고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일부 언론과 전문가로 위장한 투기이론가들"이라며 "일부 언론은 투기세력의 논리를 전달하는 확성기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05년6월24일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주최 토론회 ‘언론이 제대로 보도하면 부동산투기 막을 수 있다’)

물론 이들 기득권 옹호 언론들은 부동산이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기도 하지만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큰 공공재적인 특성을 갖는다는 또 다른 속성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따라서 100만 가구가 넘는 단칸방살이 문제나 불량주택 등 주거복지와 관련한 의제는 언론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부동산 정책, 시기 놓치면 무용지물"

2007년 들어 부동산가격 급등 현상은 진정되고 집값 내림세가 서울 강남권 재건축단지에서 강북과 수도권 전체로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민간택지 아파트의 분양원가 공개와 분양가 상한제 실시를 주내용으로 한 1·11대책의 후속절차인 주택법과 택지개발촉진법, 임대주택법 등의 개정안 입법 처리를 놓고 새로운 시장불안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심리에 민감한 부동산은 시장에 조금만 잘못된 신호를 줘도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우리사회는 반복적으로 경험했다. 2007년2월10일자 서울신문이 사설에서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시기를 놓친다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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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에 거래되는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책이 절판돼서 살 수가 없어서 비싼 값에 중고거래하시고,
국회도서관에 몇 만 원씩 줘서 제본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원래 이 책 자체가 정부부처 사이트에 올라왔던 내용을 엮은 것뿐입니다.
좋은 자료이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왜올랐나'③공급시차와 시행착오] 주택공급에서 생긴 일

"올라서 미안하고, 한번에 못잡아 미안합니다"

제1부 왜 올랐나 ③ 공급시차와 시행착오

[실록 부동산정책40년④]

특별기획팀 2007.02.15

 

 

"부동산, 죄송합니다. 너무 미안합니다. 올라서 미안하고,

국민을 혼란스럽게 하고, 한번에 잡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2007년 1월 23일 신년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거듭 사과했다. 한 달 전 부산지역 상공인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부동산 말고 꿀릴게 없다"고 말한데 이어 두 번째였다. 같은 달 31일 열린 국정과제위원회 합동심포지엄의 자료집은 부동산정책과 관련, 좀 더 구체적으로 "공급확대 대책의 추진 및 시중유동성 관리가 미흡했다"고 밝혔다.

전국 기준으로 2002년 67만호에 달했던 연간 주택건설 실적(승인 기준)은 참여정부가 시작된 2003년부터 매년 조금씩 줄다가 2006년 11월 현재 36만호 수준으로 감소했다. 수도권도 줄곧 감소하다가 2006년 11월 현재 11만호로 떨어졌다. 연말 주택건설승인이 집중되는 점을 감안하면 2006년도 전년도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참여정부 들어 주택공급이 추세적으로 감소했다.

 

 

2006년 10월 당시 추병직 건설교통부장관의 ‘신도시 추가건설’ 발언은 시장에서 공급 부족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참여정부 기간 주택공급과 관련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수도권 택지 1500만평 확보하라"

"이번 대책발표 때 어느 지역에 언제까지, 얼마만큼의 주택을 공급할 지를 구체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2005년 8월 말, 이후 8·31대책으로 알려진 부동산종합대책 발표를 앞두고 당시 부동산대책반장이었던 재경부 김석동 차관보(현 차관)는 건교부에 강하게 요청했다. 해당지역의 투기 우려 등이 제기됐지만 결국 주택공급 지역과 일정을 공개하는 쪽으로 결론났다.

 

이와 함께 8·31대책에는 향후 5년간(2006~2010년) 수도권에서 연간 300만평씩 총 1500만평을 확보하되, 그래도 택지가 부족하면 추가대책을 마련한다는 계획을 담았다.

8·31대책 공급계획은 향후 5년간 수도권에 연간 30만호를 지어야 하지만 실제 공급가능 물량은 24만호(공공 10만호, 민간 14만호)로 추산했다. 따라서 부족분 6만호를 채우기 위해 추가로 공공이 5만호, 민간이 1만호를 더 공급해야 한다고 봤다. 공공부문에서 연간 300만평의 택지를 확보한다는 계획은 바로 공공부문이 추가 공급키로 한 주택 5만호(주택 1호당 60평 가정)에 필요한 땅이었다. 민간의 1만호 추가 공급은 규제합리화를 통해 해결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민간의 공급 감소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8·31대책은 향후 5년간 수도권 1500만평 확보계획을 가시화하기 위해 서울 송파구 거여동 일대 특전사와 남성대 골프장, 문무대 부지 등 200만평의 정부 땅에 5만 가구 규모의 신도시를 개발키로 하고, 기존의 김포·양주신도시의 규모를 종전보다 337만평 넓혀 총 542만평의 택지를 확보했다.

특히 송파신도시를 위해 당시 이해찬 총리가 국방부 설득에 적극 나섰고, 조영택 국무조정실장이 이 총리의 지시를 받고 환경부 등과의 업무조율을 맡았다.

남은 958만평은 건교부가 책임지고 확보키로 했다. 김 차관보(현 차관)는 "시장을 안심시키기 위해 강남대체 효과가 큰 송파신도시 등을 발표했고, 미확보 택지는 건교부측이 책임지되 정부가 정기적으로 추진실적을 점검하기로 했다"고 회고했다.

택지확보에서 주택공급까지의 시차

이후 파주신도시 확대(212만평), 검단신도시(340만평) 추가 건설 등으로 2007년 2월 현재까지 미확보택지는 400여 만평. 정부는 앞으로 남은 400여 만평도 순차적으로 확보할 계획이다.

문제는 택지확보가 곧바로 주택공급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택지확보에서 실제 입주까지는 적어도 5~6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분당·일산 5개 신도시의 경우 계획 발표에서 분양, 입주까지 2년 만에 초고속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5개 신도시 이후 난개발 등의 문제로 사전환경성검토, 광역교통대책협의 등이 추가됐고, 관계부처와 지자체간의 협의도 보다 내실있게 진행하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처럼 일사천리로 신도시를 짓는 것이 제도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택지확보~입주까지 기간의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집값 상승 가능성을 어떻게 잠재우느냐가 숙제였다. 정부는 추 장관의 ‘신도시 추가건설’ 발언이 있은 지 한 달 뒤 발표한 11·15대책에서 개발·실시계획을 통합하고, 환경영향평가 등도 지구 지정 전후로 앞당겨 개발기간을 1년 가까이 단축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정부는 공급부족에 대한 우려를 씻기 위해 ‘수도권 주택공급 로드맵’의 구체적 모습까지 발표했다.

이날 대책을 발표하면서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정부가 분양가 완화와 공급확대에 노력하고 있는 만큼 무리하게 대출을 받기보다 이제는 마음의 여유를 갖고 공급계획을 지켜보면서 필요한 시점에 필요한 지역을 선정해 접근하는 냉정함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민간 공급의 위축

 

수도권지역 적정 공급량인 연간 30만호를 맞추려면 대개 공공과 민간이 각각 15만호씩을 분담해야 한다.

 

그러나 IMF외환위기 이후 경기부진의 여파로 1998~2002년까지 공공부문이 확보한 택지량은 크게 줄었다. 이 기간 확보한 수도권 공공택지는 연평균 360만평으로, 문민정부(1993~1997년)시절 실적(연평균 446만평)의 81%에 불과하다. 택지확보~주택분양까지의 공급시차를 감안하면 국민의정부 시절 택지확보 부족분은 이후 시차를 두고 주택공급 부족을 초래하는 한 요인이 됐다. 공공택지 확보량은 2004년 이후 연평균 600만평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역시 주택분양·입주까지 걸리는 시차로 인해 즉각적인 수급안정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또 2003년 1월부터 국토계획법(‘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시행, 다가구·다세대주택 규제 강화 등은 민간부문의 주택공급이 위축되는 요인이 됐다.

국토계획법에 따라 난개발이 제한되고 계획적 개발이 강조되면서 민간의 택지확보가 예전에 비해 어려워졌다. 또 도심지 난개발을 막기 위해 주차장과 일조권 확보 요건이 강화되면서 연간 10만~20만호씩 지어졌던 다가구·다세대주택이 2003년부터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민간부문의 공급 감소로 수도권(2003년 29만호→2005년 19만호)과 서울(2003년 11만호→2005년 5만호)의 주택공급이 줄어들자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는 주택 공급에 대한 ‘발상 전환’을 통해 공공부문의 역할 확대를 꾀한다.

"공급 부족에 선제적 대책 마련 못해"

민간 공급이 추세적으로 위축되던 당시 정부가 적절히 개입할 여지는 없었던 것일까.

대개 집값이 오르기 전에는 먼저 전셋값이 뛰는 현상이 나타나곤 한다. 이는 전세값이 주택 실수요의 변화를 가장 정확하게 반영하기 때문이다. 2차 급등기였던 1989년, 3차 급등기였던 2002년의 상황이 그랬고, 2006년 집값 급등 때도 마찬가지였다.

건교부 관계자는 "무엇보다 선제적으로 다가구·다세대 관련 대책을 마련해 전·월세 급등에 대비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실수요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정책당국을 당혹스럽게 한 것은 민간의 공급위축이 예상을 뛰어넘었다는 점이다. 수도권 내 민간 공급가능물량을 14만호로 추산하고, 규제합리화를 통해 부족분 1만호만 추가 공급하면 된다고 봤던 8·31대책의 공급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는 공급확대에 대한 정책당국간 ‘온도차’, 정확한 수요예측의 문제, 주택보급률 100%의 함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주택보급률 100%의 함정

8·31대책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의 증언은 부동산시장 안정의 양대 축인 수요관리와 공급확대정책 중 ‘어디에 강조점을 두냐’를 놓고 논박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일부에서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었는데 왜 공급이 더 필요한지 문제제기를 했다. 그러면 다른 편에서는 1000명당 주택수가 동경은 440호인데 비해 서울은 240호에 불과한 점을 근거로 주택보급률 100% 이후에도 지속적인 주택공급이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특히 통계적 요인으로 인해 적절한 공급대책을 세우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8·31대책에 참여했던 또 다른 관계자는 "8·31대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주택공급물량을 산정하려고 통계를 들여다봤더니 어떤 자료에서는 건축허가를 기준으로, 또 다른 자료는 착공을 기준으로 하는 등 제각각이어서 정확한 공급계획을 세우기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가 총체적으로 압축된 것이 ‘주택보급률 100%의 함정’이었다.

만성적인 주택부족에 시달리던 우리나라는 2002년 말 공식적으로 주택보급률 100%를 달성한다. 주택보급률 100%를 넘더라도 멸실주택, 신규가구 증가, 주택교체수요 등을 감안하면 지속적인 주택공급이 필요한데도, 이 지표는 ‘더 이상 급하지 않다’식으로 정책당국의 긴장을 늦춘 측면이 있다.

주택보급률(주택수/가구수)이란 주택수를 가구수로 나눈 비율이다. 문제는 분모인 가구수에서 1인 가구가 빠지기 때문에 실제보다 주택보급률이 높아 보이는 착시현상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통계청 센서스에 따르면 1인 가구를 뺀 총 가구수는 2000~2005년까지 5%(2000년 1208만 가구→2005년 1271만 가구), 주택수는 15.3%(2000년 1147만호→2005년 1322만호)씩 각각 늘어난다. 이처럼 가구수보다 주택수가 3배 가량 빨리 늘었기 때문에 주택보급률은 2000년 96.2%에서 2005년 105.9%로 개선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가구수 산정에서 제외되는 1인 가구(317만가구)를 포함할 경우 2005년도 주택보급률은 82.7%로 떨어진다. 여기서 분모인 가구수 역시 다가구가 주택 1채로 계산되고, 주거용 오피스텔이 제외돼 실제보다 주택수가 적게 산정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택보급률은 다소 높아진다.

정부는 이런 문제점 등을 바로잡기 위해 ‘1000명당 주택수’ 등 주택 수급상황을 좀 더 정확히 반영하는 새로운 지표의 개발을 서둘렀지만 이미 누적된 문제가 폭발한 뒤였다.

오일달러와 3저 호황 급등기의 경험

과거 집값이 급등할 때는 항상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고, 주택공급이 부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중동특수에 따른 오일달러 호황기였던 1970년대 말 1차 급등기의 경우 도시화, 핵가족화 등으로 인한 가구수 증가가 주택공급을 앞지르면서 주택사정은 갈수록 악화됐다.

1975~1980년까지 가구수 증가율은 연평균 약 4%, 총 19.9%에 달해 아무리 집을 지어도 주택보급률은 더욱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진다. 1970년 주택보급률은 전국 78.2%, 서울 56.8%였지만 1975년에는 전국 74.4%, 서울 56.3%로 오히려 주택난이 가중돼 결국 1970년대 말 집값 폭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3저 호황으로 달러가 넘치던 1980년대 말 2차 급등기 때도 주택공급이 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1978년 30만호에 달했던 주택공급은 경제위기를 겪었던 1980년 15만호로 격감한 뒤 1983~87년까지 연간 25만호에 머물렀다. 그 결과 1987년 주택보급률은 전국 69.2%, 서울 50.6%에 불과했다. 또 풍부한 시중유동성 등으로 1988~90년까지 6공화국 집권 3년만에 집값이 56% 폭등했다. 여기에 대기업들까지 사업확장을 이유로 땅 투기에 나서며 부동산가격 급등을 부추기자 주택문제에 대한 불만이 체제안정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해졌다. 이에 당시 6공 노태우 정부는 1989년 5개 신도시를 포함한 주택 200만호 건설사업을 추진한다.

이렇게 시작된 주택 200만호 건설사업은 전국을 공사현장으로 바꾸고, 임금·자재파동, 경기과열 등 숱한 부작용을 남기며 당초 계획보다 1년가량 앞당겨진 1991년 8월 조기 달성(공식기록은 214만호)됐다. 4년여 만에 우리나라 총주택(1987년 기준 645만호)의 33%를 몰아짓는 공급대책으로 서울 집값은 1991년 처음으로 하락한 뒤 1992~97년까지 하향안정세를 유지했다.

‘빨갱이’ 경제수석

집값을 잡으려면 대규모 공급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 시기의 경험을 주요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이 시기 부동산시장이 안정된 데는 공급확대 뿐 아니라 1989년 12월 국회를 통과한 토지공개념 3법(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토지초과이득세)이라는 강력한 수요억제책의 영향도 컸다.

당시 토지공개념 3법을 주도했던 문희갑 경제수석은 보수진영으로부터 ‘빨갱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6공의 운명을 걸고 토지공개념제도 도입을 실현 하겠다"며 밀어붙였다.

문 수석을 이은 김종인 경제수석도 재벌들의 비업무용 토지 강제매각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1990년 5·8조치를 주도함으로써 부동산투기 근절을 위해 대기업군과의 일전을 불사했다.

1990년대 초반 유례없는 집값 안정이 화끈한 공급대책과 강력한 투기억제책이라는 ‘투 트랙 정책’의 결과라는 점을 감안할 때 투기억제 없는 공급확대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공공부문에서 충분히 지어라"

"개인 사업자들이 집을 못 짓겠다고 하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주택공사, 토지공사 같은 공공 분야에서 대대적인 주택공급을 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006년 9월 28일 MBC 100분 토론에 출연한 노무현 대통령은 민간의 공급위축에 대비해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겠다고 밝힌다.

한 달 전 청와대에서 열린 ‘8·31정책 1주년 부동산정책회의’에서 "주공, 토공 등 공공부문이 서민주택의 시장가격 조절에 개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주택을 공급해야 하며, 이를 위한 자금조달 문제 등은 관계부처와 협의해 신속히 추진하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갈수록 뚜렷해지는 민간 주택공급 감소를 메우기 위해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곧바로 실행되진 못했다. 2006년 10월 당시 집값 급등 이후 소집된 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주택공급에 대해 실무자를 강하게 질책했다.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시도는 과거 정부에서도 종종 있었지만 결국 재원부족으로 용두사미가 되곤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 유신개혁 직후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 향후 10년간 주택 250만호를 짓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250만호의 44% (110만호 가량)를 공공부문에서 짓기로 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공공주택건설 비율이 12.6%에 그쳤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획기적인 시도였지만 이 계획은 결국 ‘돈 문제’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

이런 고질적인 재원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 2007년 ‘1·31대책’에서 발표된 ‘임대주택펀드’이다. 이 펀드는 연기금, 우체국, 보험사, 투신 등으로부터 2006~2019년까지 연평균 7조원, 총 91조원의 자금을 끌어와 2017년까지 매년 5만호, 총 50만호의 비축용 장기임대주택을 짓는 재원으로 활용된다. 이렇게 마련된 임대주택은 기본적으로 서민주거안정을 위한 것이지만 정부가 주택을 충분히 확보함으로써 집값 급등기 때 수급조절용으로도 활용하겠다는 다목적 포석이 깔린 것이다.

주택도시연구원 임서환 연구원은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재원부족으로 인해 공공부문의 주택공급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투기성 자금의 유입을 허용하거나 나아가 조장하는 방식에 크게 의존했다"며 "이는 결과적으로 한쪽에선 투기와 싸우고, 다른 한쪽에서는 투기적 수요를 부추기는 모순적 상황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공공부문 역할 강화와 이를 위한 재원인 임대주택펀드는 민간 의존적인 불안한 주택시장의 안전판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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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올랐나'②유동성과 부동산]‘큰 칼’이냐 ‘작은 칼’이냐

내수부진에 돈 줄은 못 죄고…부동산은 뛰고

[실록 부동산정책40년③] 제1부 ‘왜 올랐나’

특별기획팀 2007.02.14

 

 

판교발 집값 불안이 확산되던 2005년 5월. 부동산 투기조사를 벌이던 국세청 직원들은 한 사람이 강남에서만 무려 40채의 아파트와 상가를 사들인 사례를 적발하고는 깜짝 놀랐다. 김 모(56세·무속인)씨는 1999년부터 2005년4월까지 본인과 자녀 3명의 이름으로 강남 개포동과 대치동에서만 아파트 36채와 상가 4채를 집중 매입했다. 이후 아파트 값이 급등하자 본인 명의의 아파트 7채를 팔아 13억원의 양도차익을 챙겼다.

 

한 사람이 134억 은행대출로 강남 아파트·상가 40채 사들여

국세청 직원들을 한 번 더 깜짝 놀라게 만든 것은, 이 아파트를 사들인 자금이 불법 자금이나 탈루소득 같은 ‘검은 돈’이 아니라 은행 대출이라는 점이었다. "과거 부동산 투기자금의 출처 조사를 하면 어김없이 사업 자금 전용이나, 상속·증여세 탈루 자금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당시 투기조사에서는 은행 주택담보대출을 통한 것이어서 양도소득세 축소신고 외에는 달리 처벌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는 게 당시 조사 직원의 설명이다.

김 씨는 주택담보대출로 아파트를 사고 그 아파트를 담보로 다시 대출을 받는 방법으로 10개 금융기관에서 무려 134억원의 대출을 받았다. 그가 세무서에 신고한 연 소득은 1200만원인 반면 대출이자만 매년 8억원에 이르렀다. 김 씨가 신고한 소득으로는 한 달 이자도 갚기 어렵지만 은행 등 금융권에서는 거액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신문은 "국세청이 밝힌 부동산 투기혐의자의 사례를 보면 은행들이 투기꾼들에게 투기자금을 대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경향신문 2005년 6월14일자)고 지적했다.

 

2005년 상반기 주택담보대출금의 43%가 강남 분당 등 5개 집값 급등지역의 집을 사는데 들어갔다. 사진은 분당 전경 <사진=홍보지원팀>

세간에서는 당시 ‘무리해서라도 빚내서 집 사면 돈 번다’는 것이 공식처럼 됐다. 당시 은행에서 1억원을 빌려 3억 짜리 강남 아파트를 샀을 때 연간 은행에 내는 이자는 573만원(대출 금리 5.73%)인 반면, 3억짜리 집값은 16%(2005년)올랐다. 1년 동안 대출이자보다 9배 많은 4500만원의 차익이 생긴 셈이다. 2006년 말까지 저금리 기조 속에서 대체투자 부진까지 겹쳐 은행권에서 주택담보대출로 218조2700억원의 돈이 가계로 풀려 나갔고, 이 돈은 고수익을 쫓아 부동산시장으로 몰려갔다.

과잉유동성이 만든 버블, "돈 있는 곳에 투기 있었다"

부동산 시장에서 주택수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돈’이다. 부동산이 좋은 투자처로 여겨지는 상황에서 돈이 많이 풀려 통화량이 증가하면 어김없이 투기성 부동산 수요를 유발해왔다. 주택도시연구원 박신영 연구원은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과 도시화 과정에서 시장기본가치의 증대, 통화량의 증가, 적절한 대체투자 시장의 미성숙 등으로 부동산 값이 상당기간 큰 폭 상승했다"고 말했다.

 

 

1970년대 말 중동특수와 1980년대 말 3저 호황 등 국내 유동성이 풍부해졌을 때 어김없이 집값이 크게 상승했다. 서울대 김용창 교수는 저서 ‘한국의 주택토지정책’(2004년)에서 "그동안 부동산가격 급상승의 특성을 보면 해당 시기별로 특수한 과잉유동성에서 비롯된 자본순환의 위기에서 발생한 것"이라며 부동산 가격 변동의 큰 특징으로 ‘과잉유동성에 의한 외생적 위기’를 꼽았다.

 

국토개발연구원의 ‘주택시장 모형연구’(1994년)는

"통화공급량 변동은 12개월 후부터 주택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장기간 동안 계속되며,

실질통화량 1% 증가는 주택공급을 4.3% 증가시키는 반면

주택수요 총 증가효과는 9.9%에 달해 주택가격을 1.58% 올려놓는다"고 분석했다.

1978년-사람은 중동으로, 돈은 땅으로…

‘중동열기’ 속에 부동산 값이 급등했던 1970년대 말, 언론은 ‘77년을 특징지었던 증권 붐, 부동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환물투기(換物投機), 건축경기의 과열, 이에 따른 일손 부족, 건축자재의 품귀파동이 모두가 중동을 떼어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었다.’(조선일보 1978년 1월1일자)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동건설 붐을 타고 들어온 ‘오일 달러’와 중화학공업 육성책으로 유발된 통화팽창은 물가를 치솟게 했고, 시중에 넘치는 부동자금은 땅과 아파트로 몰려 부동산시장을 달궈놓고 있었다.

 

중동특수 열기로 인한 경기호황과 부동산값 상승을 예측하는 1978년 1월1일자 조선일보 특집면.

1974년 1차오일 쇼크로 침체하던 한국 경제는 1976년부터 세계 경제 회복과 함께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1977년에는 수출이 100억달러를 돌파했다. 수출호조에 중동진출 효과까지 겹쳐 당시 우리나라는 1230만달러나 되는 경상수지 흑자를 냈다. 중동 진출 인력은 1년 사이 3배가 늘어 해외기능공만 4만여 명이 진출했다. 1976년 경제성장률은 10.6%. 1977년에도 10.0%였다. 정부가 중화학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풀면서 통화량은 급속히 팽창했다. 도매물가 상승률이 11.6%에 달했다.

유동성 증가와 인플레 압력은 부동산 시장을 자극하여 토지와 주택가격을 밀어 올렸다. 1977년 초부터 1978년까지 아파트 투기열풍이 이어졌다. 삼익주택이 여의도에 지은 목화아파트는 당시로는 최고인 45대1의 분양경쟁률을 기록했다. 뒤이어 지은 화랑아파트 분양에서는 70대1. 화랑아파트 당첨자는 하루아침에 15만~250만원의 웃돈을 거머쥐었다. 건설부 표본조사에서는 이런 아파트의 절반 이상이 투기세력에 분양된 것으로 나타났다. 한 다리 건너면 20~30%의 프리미엄이 붙는 미등기 전매가 극성을 부렸다. 1978년 전국 땅값은 평균 49%, 6대 도시는 79%, 서울은 136%나 상승하는 기록을 쏟아냈다.

당시 정부는 ‘8.8조치’라는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지만, 통화 금융을 다루기보다는 규제와 제도개편에 초점을 맞출 뿐 중화학공업 육성과 고성장이라는 달리는 말의 고삐를 멈추지는 못했다.

L.B. 크라우스 UCSD(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캠퍼스) 명예교수는 1978년의 한국경제를 진단하는 한 기고에서 "부정적인 방법으로 손쉽게 축재한 자금은 자산, 특히 부동산 가격의 상승을 부추겼다. 부동산 투기자들에게 부동산 과열의 책임이 있지만 사실 은행으로부터 손쉽게 대출을 받을 수 없었다면 이런 과열 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대출의 주체는 개인보다는 기업이었지만 이미 30년 전, 손쉽게 얻은 자금은 투기로 연결됐다.

 

1988년-흑자경제의 그늘…투기의 부활

1980년대 후반의 부동산 투기열풍도 저달러·저유가·저금리가 가져다 준 흑자경제에서 비롯됐다. 달러 평가절하(엔화 평가절상) 상태를 만들기 위한 이른바 ‘플라자 합의’ 에 이어 유가가 하락하면서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고 불리는 ‘3저 호황’이 이어졌다. 1986년 47억달러로 시작한 경상수지 흑자는 이듬해 100억달러, 1988년에는 145억달러에 이르렀다. 1986년부터 3년 연속 10%대를 넘긴 경제성장률은 1988년까지 3년 평균 10.76%를 기록했고 대선이 치러진 1987년 통화량 증가율은 전년 대비 30.8%에 달했다.

돈이 시중에 흘러넘치자 또다시 부동산 투기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1987년 토지가격 상승률이 전년의 2배를 기록, 투기 광풍의 전조를 보이더니 1988년에 들어서자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1980~1987년 연평균 10.5%였던 지가상승률 1988년 전국 평균 27.5%, 이듬해 32.0%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1988년 13.2%를 기록한 집값 상승률 이듬해 14.6%, 1990년에 최고인 21.0%를 기록했다.

급기야 정부는 1988년 투기억제 지역의 확대, 양도세 중과, 투기꾼 및 부동산 업자에 대한 세무조사 강화 및 토지공개념 도입을 골자로 하는 ‘8.10 부동산종합대책’을 내놓았지만 투기억제의 강도에 비해 통화량 축소와 물가안정에 관한 부분은 그해 총통화량 증가율을 18% 선에서 억제한다는 것 외에는 뚜렷한 내용이 없었다.

2005년- 내수부진 속 과잉유동성과 부동산 투기의 딜레마

2001년 이후 부동산시장 불안은 세계적 저금리 추세에다 IMF 외환위기 이후 금융 패러다임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의 차입금 축소 등 재무구조 개선 요구와 투자 부진 등으로 기업 부문에 대한 대출은 급속히 축소된 반면, 지금까지 은행 자산운용에서 비중이 극히 낮았던 가계 대출이 안정적 자산운용처로 부각됐다.

부실우려가 높은 기업 부문 대출은 자연스럽게 줄였고, 대신 담보(집)가 확실하고 이자 수익률도 높은 가계대출은 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은행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생산성이 없는 가계 부문 대출을 제한하던 정부도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가계 대출에 대한 창구지도를 풀었다. 외환위기 이후 쏟아진 규제완화 및 유동성 확대를 통한 경기부양은 갈 곳 없는 시중자금의 단기부동화를 더욱 부추겼다.

은행의 가계대출 추이를 보면 2000년 말 54조2,000억원에 불과하던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은 2006년 상반기 200조8000억원(2006년 말 218조 3000억원)으로 부풀었다. 특히 2001년과 2002년 중 주택담보 대출은 매년 50% 이상 초고속으로 늘어났다. 여기에 카드사와 할부금융사 등 기타 여신전문 회사의 대출까지 포함할 경우 총 가계대출은 1999년 214조원에서 2006년 초에는 545조5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이러한 막대한 자금의 일부가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었으니 부동산 시장이 조용할 리 없었다.

 

부동산 '버블' 대책과 금리논쟁

이처럼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말, 그리고 2001년 이후의 부동산 과열에는 통화량이 상당한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부동산시장을 잡는 정책적 노력에 유동성과 금리 등 통화운용정책의 고려비중은 낮았다. 서울대 김용창 교수는 "그동안 부동산 가격 상승에 대응하는 대책의 특징은 이처럼 부동산 부문 이외의 원인(과잉유동성)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부동산 부문 자체에서만 해결책을 찾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부동산 시장 교란의 원인과 처방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셈이다.

삼성경제연구소 최호상 수석연구원은 2006년 11월 발간한 ‘주택시장 불안과 금리’ 보고서에서 "영국 호주 미국 등은 주택가격 급등에 따른 인플레이션 압력을 줄이기 위해 금리를 단계적으로 인상해 주택가격 상승을 둔화시킨데 비해 한국의 주택경기 연착륙 정책은 주로 수급조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보고서는 2005년 상반기 기준 국내 주택가격 버블의 크기는 17%이며, 이 중 금리요인에 의한 것이 11.6%로 총버블의 3분의2를 차지한다고 진단했다. 또 경기 상승기에 금리조절 속도가 늦어진 것이 부동산 시장 과열의 큰 원인이 된 것이라는 판단을 내놓아 지난해 말 ‘금리논쟁’에 불을 지폈다.

경기와 부동산, 다른 방향으로 튀는 두 마리 토끼

유동성과 관련해 정부가 신중한 접근을 한 배경에는 2001년 이후의 부동산가격 상승이 과거와는 달리 내수 부진과 부동산 과열이 함께 찾아온 어려운 상황이 있었다.

"지금은 심각한 경기침체와 부동산과열이 같이 왔기 때문에 현재 상황에서는 거시적인 방법으로 유동성을 줄여서 부동산투기를 막는 것은 부동산 투기 억제의 효과는 별로 없고 그 대신 경기를 죽이는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날 우려가 있어..."(2003년 6월17일 국회재정경제위원회 속기록)

 

‘정부 행정력에 의존한 미시적 부동산 가격 안정대책만으로는 급등하고 있는 부동산가격을 잡기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에 대한 당시 박승 한국은행 총재의 답변에는 부진한 경기와 부동산 과열이라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뛰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대한 고민이 드러난다.

2001년 이후 저금리 속 부동산 값 급등이라는 고민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영국의 유력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2004년 9월9일자)에 따르면, 세계 20개 국가의 주택가격을 조사한 결과 11개 나라의 집값이 두 자리 수 상승률을 기록했다. 가장 높은 곳은 홍콩으로 무려 28.7%나 급등했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25.5%, 뉴질랜드 22.1% 등이 20%가 넘었다.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집값이 과거 정점기보다 과대평가돼 있다"면서 "중국과 남아공을 비롯해, 세계 3분의 2 지역에서 주택가격 거품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적 저금리 속 주택 거품…각기 다른 처방

이 같은 세계적 주택가격 거품 앞에 경기 조절의 여유가 있는 국가들은 통화조절이라는 ‘큰 칼’을 사용했다.

 

영국은 2003년 11월 중앙은행이 주택가격 거품붕괴로 인한 경기침체를 방지하기 위해 정책금리를 인상한다고 발표한 이후 9개월 동안 5차례에 걸쳐 정책금리를 1.25% 포인트 인상한 결과 주택가격 상승률이 2003년 19.6%에서 2005년 5.3%로 둔화됐다. 호주도 2002년 5월부터 4년6개월 동안 8번에 걸쳐 기준금리를 2%포인트 인상해 지난해 11월 기준금리를 6.25%까지 높였다. 그 결과 2003년 18.2%이던 주택가격 상승률이 2004년 6.9%로 안정됐다.

이처럼 영국과 호주 미국은 점진적 금리인상과 정책대응으로 연착륙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반면, 부동산 버블 붕괴로 10년간 복합불황을 겪은 일본과 스웨덴은 경착륙으로 인한 후유증을 크게 겪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스웨덴은 1985년 이후 부동산 대출이 급증하면서 상업용 부동산이 1991년까지 116%나 상승하자 1988년 중반 이후 2년 반 동안 80여 차례 기준금리를 변경하면서 7%포인트 인상한 결과 부동산 가격이 1992년과 1993년 각각 9.2%, 11.2% 하락하며 부동산 관련 대출의 부실화와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동산 담보대출 급증 등 유동성 과잉의 조짐이 2005년 1분기에 나타났지만 경기부진이라는 딜레마 때문에 2005년 10월부터 금리인상에 나섰다. 속도도 조절해 2~4개월 주기로 0.25%포인트씩 5차례 인상하는 한편, ‘작은 칼’인 금융기관의 대출 규제라는 미시적 방법을 병행했다.

 

‘작은 칼’, 미시적 대응의 사각지대를 잡아라

2005년 당시 미시적 대응은 바로 ‘투기지역’에서 아파트 담보대출을 1건이라도 받은 차입자의 추가 대출을 제한하는 ‘1단계 주택담보대출 리스크 관리 강화방안’ 이었다. 하지만 주택담보대출 관리방안 1단계에서는 시장의 충격 정도를 감안, 대출 제한을 개인으로 정해 동일세대이더라도 배우자나 자녀, 또는 그들의 명의로 투기지역에서 여러 건의 추가 주택담보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다른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후 돌려 막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이 주택담보대출 실태조사에 나서 현장을 확인한 결과 강남 송파 서초와 분당 용인지역에서 2건 이상의 주택담보대출을 받은 차입자가 배우자 또는 자녀 명의로 추가대출을 받은 건수가 7개 은행에서 2116건에 총 1881억원에 달했다.

이후 2005년 8월 후속 대책에서 처음으로 소득에 따라 상환능력을 고려하는 제도인 DTI(Debt To Income) 규제까지 추가 도입됐지만 주택담보대출 증가세는 2006년 하반기까지도 꺾이지 않았다. 은행권주택담보대출은 2006년 4월 및 5월에 각각 3조1000억원과 3조원 증가했는데 이는 2005년 중 월 평균 1조7000억원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당시 은행권에서 ‘4강 체제’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경쟁의식이 맞물리며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경쟁적으로 확대한 데도 원인이 있었다.

저금리-부동산과열-대출증가-소비부진-저금리 악순환

결국 낮은 금리는 상당수 전세 수요자를 매매 수요로 돌아서게 했다. 아파트 매매계약서만 있으면 은행은 돈을 빌려주고, 직장인들은 벌어들이는 소득의 4분의 1 이상을 이자로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주택담보대출이 증가하면서 이자 부담 때문에 소비를 하지 않고, 소비 부진은 내수부진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금리를 올리지 못하는 순환 고리가 지속됐다.

 

금융연구원 한재준 연구원은 "소비위축 우려로 정책당국이 금리를 높은 수준에서 유지하기 어려웠던 점은 인정되나, 부동산시장이 폭등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급확대에는 시차가 따르고 금리 이외의 수단인 단기적인 대출규제 방책만으로 안정을 도모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동산 공룡을 다루는 새로운 방법

정부는 지난해 11.15 ‘부동산시장 안정화방안’과 올해 1.11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제도개편 방안’에서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해 부동산 버블이 더 커져 금융 시스템의 건전성을 해치는 것을 방지하는 조치를 적극 취하고 있다. 토지보상금이 부동산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채권보상을 확대 하는 등 토지보상제도를 고치고, 다주택 보유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하는 등 더 강력하고 근본적인 유동성 관리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언론’과 투기세력들은 이 같은 미시적 대응과 대출규제조차 ‘서민의 내집마련 기회를 옥죈다’고 흔들고, 서너 발 앞서 부동산 시장 ‘경착륙’과 ‘복합불황’을 경고하며 꺼져가는 ‘부동산 불패’ 신화에 끝없이 불을 지피고 있다. 대출규제 대상인 투기지역 내에서 2건 이상의 담보대출을 받은 사람이 묵묵히 생업에 종사하는 서민층이라고 보고 정책적으로 보호해야 할 대상인지 반문하게 한다.

대표적인 시장왜곡의 결과물인 부동산이라는 공룡 앞에 정부는 ‘저금리를 통한 성장촉진’과 ‘부동산 가격 억제’라는 서로 상반된 목표의 정책 퍼즐을 맞춰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경제 살리기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정부는 ‘한 쪽 손’이 묶인 채 부동산 시장왜곡과 맞서 싸우고 있다. 그런데도 ‘나머지 한 쪽 손’마저 무력화시키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정부의 싸움은 그만큼 힘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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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에 거래되는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책이 절판돼서 살 수가 없어서 비싼 값에 중고거래하시고,
국회도서관에 몇 만 원씩 줘서 제본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시더군요.

원래 이 책 자체가 정부부처 사이트에 올라왔던 내용을 엮은 것뿐입니다.
좋은 자료이니 읽어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왜올랐나'①경기부양]"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

경기부양, 투기를 유혹하는 목소리

[실록 부동산정책40년②] 제1부 ① 경기부양과 부동산의 딜레마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1960년대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함께 크게 움직이기 시작해 지난 40년간 도시화에 따른 수급 불균형과 공급시차,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향상과 과잉 유동성, 건설경기 부양 유혹, 부동산 투기심리에 대응한 제도와 정책 미비 등의 요인들에 의해 변동을 겪었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총론에 이어 ‘제1부, 왜 올랐나’라는 주제로 이들 4가지 가격변동 요인을 분야별로 4회에 걸쳐 싣는다.
<1부> 왜 올랐나
1-경기부양과 부동산의 딜레마
2-유동성과 부동산
3-공급시차와 시행착오
4-부동산 심리와 정책불신

2006년 7월 12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이날 인사청문회는 청와대 정책실장에서 경제부총리로 옮겨온 권오규 후보자와 열린우리당 강봉균 정책위의장간 설전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주제는 경기진단과 경기부양. 두 사람은 과거 경제기획원(EPB)에서부터 상하관계로 일해 오며 인연이 깊었다.

강봉균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만약에 작년도에 4%밖에 성장이 안됐다면 내년쯤에서 6% 성장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게 없는 거란 말이에요. 경기부양이라는 것은 거시경제 정책을 운용하는 정책 당국의 인위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후보자=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거나 지나치게 확장적으로 경제 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정책 방향은 잠재성장률 경로를 따라가는 한에 있어서는 인위적인 부양을 하지 않는다는 스탠스를 유지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의장=지금 체감경기가 너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잠재성장률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1, 2% 정도 성장을 높일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이것을 해서 하나도 나쁠 게 없다 이게 제 생각인데.
권 후보자=저는 그점은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잠재성장률 경로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일단 경기가 들어가게 하면 그 다음 단계에는 분명히 잠재성장률 아래쪽으로 반작용이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성장률 경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속기록)

경기부양을 둘러싼 입장차는 얼마 뒤 제주에서 열린 전경련 하계포럼에서 다시 불꽃을 튀었다. 같은 달 29일 강 의장은 "건설경기는 정부정책에 의해 강온조절이 가능한 유일한 분야다. 건설분야를 단기적 경기관리 수단과 영역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 전반을 살리기 위해 ‘건설경기 부양’ 카드를 과감히 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하루 전날 같은 자리에서 권 부총리는 "인위적 건설경기부양은 바람직하지 않다.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해서 재정을 투입해 건설경기를 띄우던 시절은 지났다"며 정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경기부양을 보는 관점

경기부양에 대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의 잠재성장률을 어느 수준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잠재성장률이 낮은데도 이를 초과해 경기를 부양한다면(인플레이션 갭) 경기과열, 물가상승 등이 일어난다. 반면 잠재성장률이 높은데도 실질성장률이 여기에 못미친다면(디플레이션 갭) 경기침체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거시경제에 대한 시각차 외에 정치적 입지도 경기부양에 대한 입장이 갈리는 이유이다. 여론에 민감한 여당으로서는 체감경기와 일자리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경기부양에 적극적인 반면, 경제의 안정적 운용을 중시하는 정부는 경기부양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가 잠재성장률을 웃도는 경기부양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위적인 경기부양은 당장의 약발은 좋지만, 궁극적으로 경제의 기초체력(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동산시장이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재정확대, 규제완화 등 대대적인 경기부양은 투기심리를 자극해 큰 낭패를 초래할 수 있다.

◆ 참여정부의 뼈아픈 실책
참여정부도 딱 한 번 경기부양의 유혹에 흔들린 적이 있다. 그 결과 투기의 부활이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된다.

2004년 6월 18일 열린 경제장관간담회에서 당시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성수기인데도 건설·제조·서비스업은 물론 농업부문에서도 고용증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포문을 연 뒤 며칠 뒤 정례브리핑에서 "건설수요는 올 4분기부터 내년에 걸쳐 전반적으로 가라앉을 것이며, 건설투자의 급감을 막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당시는 2003년 10·29대책으로 건설경기를 중심으로 내수가 위축되면서 침체된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창 힘을 얻고 있을 때였다.

 

조선일보 2003년 12월 10일자. 2003년 10.29대책으로 집값이 잠잠해지자 지방건설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건설경기 회복을 돌파구로 정한 이 부총리는 다음달 1일 사회간접자본(SOC) 등 건설투자를 확대하고, 주택건설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의 ‘건설경기연착륙방안’(7·1방안)을 발표한데 이어 8월에는 전국에 골프장 250개를 지어 일자리를 만든다는 ‘골프장 경기부양론’을 들고 나온다.

때마침 한국은행도 당시 3.75%인 콜금리 목표치를 13개월 만에 3.5%로 낮춘다. 당시 박승 한은총재는 "예상치 못한 고유가로 경제성장률이 떨어진데다 내수는 더디게 회복되는 반면 수출·건설경기가 너무 빠르게 식고 있다. 금리인하가 물가를 자극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경기를 살리는 게 더 급하다"고 인하 배경을 설명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 부총리는 "오히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있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은의 콜금리 인하가 결정되던 바로 그날, 당시 재경부 이종규 세제실장은 "부동산경기가 하락할 때 쓰는 정책은 상승할 때의 정책과 같을 수 없다"며 종합부동산세 등 부동산세제의 완화를 시사한다.
이 때를 기점으로 정부와 여당 안에서 종부세 도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시 청와대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 등을 중심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나섰지만, 2004년 말 입법과정에서 종부세 과세대상은 원래 생각했던 공시가격 6억원 이상에서 9억원 이상으로 완화되고, 가구별 합산도 개인별 합산으로 크게 후퇴한다. 시민단체는 종합부동산세가 ‘종합구멍세’가 돼버렸다며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다.

정책후퇴의 신호

잇단 건설경기 부양책, 종부세 후퇴는 시장에서 정책 후퇴로 받아들여졌다.
2003년 10·29대책 이후 1년 넘게 잠잠했던 집값은 2005년 들어 판교신도시분양, 강남 압구정동 초고층 재건축 추진 등 휘발성 강한 재료와 겹치면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정부는 2005년 8·31대책을 통해 후퇴시켰던 종부세 등을 원상복귀시켜야 했다.

종부세의 후퇴와 원상복귀 과정은 원칙의 후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준다. 특히 투기심리가 팽배한 부동산시장에서 작은 후퇴의 신호 하나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 의미에서 투기꾼들이야 말로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는 믿음의 수호자이자 기다림의 달인이다. 이들은 아무리 혹독한 투기근절책이 나와도 언젠가는 풀린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들의 소위 ‘학습효과’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경기부양의 요구였다.

투기꾼들에게 가장 화창한 봄날은 역설적이게도 IMF외환위기였다.
IMF외환위기 이후 경기부양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경기부양을 이유로 각종 부동산관련 규제가 대대적으로 풀리기 시작한다.

◆ IMF외환위기 이후 대대적인 경기부양
2001년 2월 7일, 건설업계가 마련한 당시 김윤기 건설교통부장관 초청 간담회.
이날 행사에서 김 장관이 "올해 건설예산의 85%를 상반기 중 집행하는 등 건설경기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운을 떼기 무섭게 건설사 사장들의 요구가 쏟아졌다.

이중근 부영회장=과거 투기억제 수단으로 도입된 양도세는 주택보급률이 100%에 육박하는 만큼 폐지돼야 한다. 집을 살 때 부담하는 취득·등록세도 주택업을 제조업으로 분류해 감면해 달라.
박성대 대동주택 명예회장=유지, 관리가 미흡해 붕괴사고가 일어나도 건설업계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시설물의 유지, 관리비 책정을 늘려야 한다.
김언식 삼호건설 사장=대한주택보증 출자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으나 주택보증의 부실화로 출자금은 날아가고 대출 빚만 남게 됐다. 주택보증 출자금은 업체가 원해서 낸 게 아니라 주택업을 하려면 의무적으로 내도록 했던 것으로 출자금이 없어졌으니 대출금도 탕감해줘야 한다. (중앙일보 2001년 2월8일)

그리고 3개월 뒤인 5월 23일, 정부는 생애최초 주택구입자에게 집값의 70%까지 대출해주고, 2001년 말까지 구입한 신축주택에 대해 양도세 면제, 취득·등록세 50% 감면 등의 내용을 담은 ‘건설산업 구조조정 및 투자적정화방안’(5·23방안)을 발표한다. 국민의정부 들어 10번째 발표된 주택경기 활성화 대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1998~2001년 5월까지 3년 6개월동안 모두 10번, 평균 4개월에 한 번꼴로 부양책을 내놓은 것이다. 정부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업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대대적으로 규제를 풀어서라도 건설경기를 살리는 것이 절실했다.

2001년 2월 청와대가 대통령 취임 3주년을 맞아 공개한 김대중 대통령의 메모에는 당시 대통령이 건설경기부양을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김 대통령의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지방경제 어렵다는 여론, 건설경기 위축, 재래시장 문제, 기업 지방 이전, 지방건설업 자율조정, SOC사업 조기 시행’ 등의 친필 메모가 적혀 있었다.

취임 1년 반 만인 1999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IMF졸업’을 공식선언했던 정부는 같은 해 8월 말 대우그룹 사태, 다음해 3월 현대그룹 ‘왕자의 난’ 등으로 경기가 급속히 얼어붙자 경기부양효과가 큰 주택시장 부양책을 쓰기 시작한다.

대대적인 규제완화

 

조선일보 1999년 4월 9일자. 당시 정부는 주택경기 활성화를 위해 대대적인 규제완화를 실시한다.

1998년 먼저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한데 이어 99년 아파트 분양권 전매 허용, 아파트 재당첨 제한 폐지 등의 조치를 잇달아 내놓는다. 또 2000년부터 아파트 임대사업을 장려하고,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대책 등을 본격화한다.
2001년에는 2003년 6월까지 전용 25.7평 이하 신규 주택을 취득할 때 취득·등록세 25% 감면, 부동산 투자회사가 부동산을 취득할 때 취득·등록세 감면, 소형주택 구입자금 저금리 지원 등의 지원이 잇따른다.
이런 조치들은 정부가 암묵적으로 투기를 감수하더라도 주택경기를 부양시키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경기부양을 위한 확장적 재정, 통화정책이 총동원되면서 콜금리도 2001년 한 해 동안 모두 4차례 인하돼 사상 최저치인 연 4%로 떨어진다. 같은해 9월 19일 4번째 콜금리 인하를 결정한 뒤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전철환 한은총재는 "미국 테러 참사에 따른 대외여건 악화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콜금리 인하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규제완화와 풍부한 유동성으로 건설경기를 중심으로 서서히 경기가 달아오르고, 강남 재건축단지를 중심으로 투기조짐이 나타나자 2002년부터 부동산정책은 완연한 안정정책으로 돌아선다.
당시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이었던 이춘희(현 건교부 차관)의 회고다.

"2001년 경기가 싸늘할 때 5·23부양대책을 발표하고 한 달 뒤 당시 이기호 경제수석에게 업무보고를 하면서 ‘이제부터는 투기대책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대부분 집값이 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면과제는 투기억제가 아니라 경기부양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가 걱정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12월부터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고, 연말 이 수석에게 투기대책을 발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2002년 들어 1·8대책, 3·6대책 등이 발표됐다."

 

대대적인 규제완화로 투기가 부활할 조짐이 보이자 2002년 완연한 안정정책으로 돌아선다. 표는 재정경제부, 김종찬 저서 '황금낙하산' 109페이지 인용

2002년 들어서는 1, 3, 9, 10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안정대책이 쏟아진다. 주택경기 부양을 위한 대대적인 규제완화의 효과, 확장적인 통화정책에 따른 유동성 과잉 그리고 IMF외환위기 이후 3년(1998~2000년)간 연간 50만호를 밑돈 주택공급 부족분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집값 상승도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부동산 1차 순환기, 80년대 말 2차 순환기 등 집값 폭등기 때의 공통적 특징은 과잉 유동성과 주택공급 부족이 집값 상승의 원인이었다. 2001년 이후부터 참여정부 기간 내내 지속된 최근 집값 파동은 이러한 2가지 원인 외에도 이전 정권에서 이뤄진 대대적인 규제완화의 부작용이 한꺼번에 노출됐다는 특징을 갖는다.

규제완화의 부작용

국민의정부 시절 IMF외환위기 이후 침체된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추진된 대대적인 규제완화가 결국 부동산투기 부활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2003년 초 당시 인수위 경제2분과로부터 부동산관련 대책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라고 말했다.(이춘희 현 건교부 차관의 회고)
건설경기부양을 위해 일정 수준 규제를 푸는 과정에서 투기억제를 위한 필수 규제마저 무장해제 시켰다는 지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발표된 일련의 대책들은 이전 정권에서 마구잡이로 해체된 투기억제책을 다시 원상복귀 시키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 82년의 경험
경기부양을 위해 섣불리 규제를 풀었다가 부동산투기를 일으켰던 경험은 5공화국 시절인 1982~84년에도 있었다. 1982년은 이철희·장영자 사채파동을 수습하기 위해 자금이 집중적으로 풀린데다, 그린벨트에서도 목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초지조성계획’(10년간 1조원 투자사업)이 발표되면서 부동산경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앞서 1980년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는 등 경기침체가 가속화되자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여러 차례 양도소득세를 내리거나 각종 건축규제를 풀고, 부동산 거래자금의 출처 조사와 특정지역에 대한 투기활동에 대한 감시를 중단한다.
이러한 규제완화의 효과가 누적되면서 1982년부터 한동안 잠잠했던 투기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투기조짐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1982년 11월, 당시 김준성 경제부총리는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대책마련에 나선다. 이에 따라 1983년 4월 아파트 불법전매, 아파트 구입자금 출처, 부동산 중개업소의 불법 거래중개행위 등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는 등 주택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4·18조치’가 발표된다.
1982년 12·22 주택투기억제대책, 1983년 2·16 부동산투기억제대책에 이은 3번째 대책이었다.

1978년 8·8조치 이후 침체됐다가 1982년을 전후해 반짝했던 부동산시장은 당시 5공 정부의 투기억제 대책으로 다시 1986년까지 침체기로 빠져든다.
규제완화의 유혹은 언제나 경기부양의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며, 규제완화를 동반한 섣부른 경기부양책은 결국 투기의 부활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1982년의 경우에는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 경기부양의 정치논리
그렇다면 왜 경기부양의 요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일까.
이는 경기 자체가 상승기와 하강기를 반복하는 자율적인 순환사이클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재정과 금융통화라는 정책수단을 동원해 경기의 진폭을 줄이는 경기부양은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한 나라의 경제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잠재성장률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인위적으로 경기를 자극할 경우 각종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경기 하강기에는 생산 감소, 실업증가 등으로 경기부양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기 때문에 여론에 민감한 정치권은 인위적 경기부양의 카드를 꺼내드는 경우가 많다. 이중 선거는 가장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절이기 때문에 인위적 경기부양의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선거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부동산투기라는 부작용이 연례행사처럼 뒤따르곤 한다. 6공화국 출범 직전인 1987~88년이 대표적이다.

당시 여야 대선후보들은 전국을 돌면서 선심성 개발공약을 남발, 이들이 지나간 곳은 어김없이 땅값이 폭등하곤 했다. 특히 당시 노태우 후보가 서울과 설악산을 잇는 동서고속전철을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자 해당지역 땅값은 평당 5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뛰어올랐고, 역시 노 후보의 공약이었던 서해안종합개발계획으로 평당 8000원짜리 녹지가 1만5000원으로 치솟았다.

2007년 1월 현대경제연구원이 1995~2004년 4월까지 총 8번의 전국 선거(대선, 국회의원선거, 동시지방선거 등)를 분석한 결과 1998년 2회 동시지방선거를 제외한 7번의 선거에서 선거가 열린 달의 전국 아파트 값이 6개월 전과 비교해 빠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동안 평균 가격상승률은 약 2.8%였으며, 특히 강남은 4.05%의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는 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경기부양책이 등장하는데다 각 후보들이 득표를 위해 그린벨트 해제, 재건축규제완화, 도시재개발사업 등 각종 선심성 공약을 쏟아내 투기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건설업과 경기부양
그렇다면 경기부양의 요구가 나올 때마다 건설업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직접적으로는 건설업의 특성상 전후방산업연관효과, 고용창출효과가 매우 커 경기부양의 효과가 가장 화끈하기 때문이다. 2005년 건설산업연구원은 1조원의 건설투자가 이뤄지면 대략 2만8000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1조9900억원의 부가가치가 창출돼 경제성장률이 0.1%포인트 높아진다고 분석하고 있다.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이 커짐에 따라 건설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 사진은 2006년 서울 은평뉴타운 공사현장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경제에서 건설업이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은행, 통계청 등에 따르면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은 2005년 9%였다. 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총 부가가치 중 9% 가량이 건설업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또 2005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대비 건설투자의 비중은 19%였다.
특히 건설업의 총 부가가치 비중과 GDP 비중이 1990년대 초를 전후해 급격히 높아졌다. 부가가치 비중은 1985년 7%에서 1990년 11.3%, 1995년 11.6%까지 높아졌다가 2000년 8.3%로 다소 낮아진다. 또 GDP 비중 역시 1980년대까지 15% 안팎에 머물다가 1990년 22%로 높아진 뒤 1998년까지 20%대를 유지하다가 1999년부터 다소 낮아지고 있다.

1990년대 초를 전후해 건설업의 비중이 획기적으로 커진 것은 이 시기 분당·일산 등 5개 신도시를 포함, 주택 200만호 건설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25만호 수준에 머물던 주택건설 실적은 1989년 46만호로 늘어났다가 1990년 사상 최대인 75만호까지 폭증한다. 건설과열을 빚자 1991년 들어서는 잇달아 건설경기 진정책을 내놓아야 할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주택 200만호 사업을 계기로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이 확고해짐에 따라 건설업의 부침에 의해 국내 경기 전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인위적 경기부양을 위해 가장 먼저 건설업, 특히 주택부문을 자극하게 되는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토건국가적 사고방식

건설업이 경기부양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역사적 뿌리는 1960, 70년대 개발연대의 토건국가적 사고방식일 것이다.
토건국가란 원래 우리처럼 건설업이 비대해진 일본의 정·관·건설업계의 부정적 공생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상지대 홍성태 교수(사회학)는 "개발국가의 가장 타락한 형태가 바로 토건국가"라며 "토건국가는 토건업과 정치권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를 뜻한다"고 말했다.

홍 교수에 따르면 개발독재시대 비대해진 건설, 토건업은 자신의 국민경제적 비중이 커짐에 따라 건설, 토건업이 경착륙하면 경제가 갑작스럽게 침체에 빠진다는 논리를 앞세워 주기적으로 경기부양의 요구를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반대로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이에 투자하는 것을 전체 경제성장과 동일시함으로써 끊임없이 대규모 토목·건축사업을 부추기게 된다.

과도한 건설투자(특히 주택부문)의 문제점은 건설업의 한계자본계수(GNP 한 단위를 늘리는데 필요한 자본량)가 제조업에 비해 크기 때문에 수요 진작 효과는 크지만 생산유발효과는 크지 않은, 기본적으로 소비성 투자라는 점이다.
따라서 적정수준을 넘어선 건설투자는 경기부양이라는 반짝 효과는 크지만 장기적인 성장동력 확충에는 별 효과가 없다.

과거의 부정적 유산과 결별

2001년 한국과학기술평가원이 1970~94년까지 25년동안 투자유형별로 1조원을 투자했을 때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결과 건설경기 부양에 쓸 경우 △첫 해에 0.42%의 경제성장 효과가 나타나지만 △5년 후 첫해 대비 마이너스 0.01% △20년후 마이너스 0.16% △30년 후 마이너스 0.31% 성장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1조원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할 경우 △첫 해에 0.25%의 경제성장을 가져온 뒤 △5년 후 첫해 대비 0.06%로 성장률이 떨어지지만 △10년 후 0.24% 성장으로 높아지고 △30년 후 1.54% 성장하는 등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기여도가 높았다.

2006년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권오규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인위적 경기부양을 요구하는 정치권의 요구에 대해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고 답했다. 이 한마디는 개발독재시대의 토건국가적 사고와 손쉬운 단기 경기부양 처방, 부동산투기를 무릅쓰고서라도 경기부양에 매달리는 모험주의적 정책관행 등 부정적인 과거유산에 대한 참여정부의 결별 선언이자, 정책적 원칙에 대한 확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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